포틀랜드 여행 #14 파웰서점
[포틀랜드: 세계 최고의 독립서점 파웰서점]
시애틀 킹 스트리트역에서 기차를 타고 3시간 넘어 도착한 포틀랜드 유니언역에서 내려, 다운타운에 있는 에이스 호텔로 걷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파웰 서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럴 것이 이 힙한 도시의 2천평 정도 되는 한 구역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CNN이 ’세계 최고의 서점’이라는 기사에서 파웰 서점을 소개할 때, 이 서점에서만 2-3일을 보낼 생각을 하고 오라고 했을 정도이다. 이 서점은 새책과 헌책을 모두 취급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월터 파웰(Walter Powell)이 설립한 이 서점을 시카고에서 역시 서점을 하던 아들 마이클 파웰이 1982년 사들였고, 현재는 마이클 파웰의 딸인 에밀리 파웰이 이끌고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서점을 처음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시카고 대학 대학원생이었던 마이클 파웰은 1970년에 교수와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3천 달러를 빌려 시카고에서 책방을 열었다. 책방은 뜻밖에 잘 되어 꾼 돈을 두 달 만에 모두 갚게 된다. 페인트 관련 일을 했던 아버지 월터 파웰은 은퇴한 뒤 여름에 아들의 서점에서 일을 도와주게 된다. 서점 일에 재미를 느낀 월터 파웰은 고향인 포틀랜드로 돌아와 헌책방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엄청난 크기의 서점에 대해 살펴보다가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미리암 손츠(Miriam Sontz)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2013년 4월에 파웰 서점의 CEO로 취임하여 2019년 1월에 은퇴했다. 손츠는 1984년부터 무려 34년 동안 이 서점에서 일했으며 미국 서적상인협회(American Booksellers Association)나 독립서적상인컨소시엄(Independent Booksellers Consortium)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포틀랜드 시내에 있는 이 서점에만 1백만 권의 책이 있다. 서점의 크기나 책의 숫자보다 손츠가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1백만 권의 책이 모두 서점의 큐레이션을 거쳐 엄선했다는 자부심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서점이란 ‘뜻밖의 발견이나 만남을 뜻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로 가득한 세상’으로 표현했다. 우리가 서점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코너나 책을 찾게 된다. 그리고 내가 찾는 책 주변에서 뜻밖의 발견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구분하고 배치하는 것은 서점의 정책이나 직원의 우연한 선택 등의 영향을 받는다. 이 번에도 파웰 서점에서 동일한 코너를 두 번 갔었지만, 눈에 보이는 책들은 모두 달랐다. 온라인에서도 이런 세렌디피티가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알고리즘이 만들어주는 것과 수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선택을 거쳐 내 눈과 손에 들어오는 우연과는 비교하기 힘들다.
손츠는 서점의 역할을 자신이 한 저녁 파티에서 만난 여성이 실제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 그 여성은 얼마전 이혼을 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저녁에도 문을 여는 파웰 서점에 들어오게 된다. 평소 서점에서 잘 가지 않던 코너를 거닐다가 우연히 발 앞에 떨어진 책이 바로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The Art of Happiness)>이었다. 커피숍에 가서 이 책을 읽은 그는 일요일에 명상수업이 있는지 찾게 되고, 삶에서 힘든 시간에 서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말콤 글래드웰도 책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조사 방법 중 하나로 도서관을 꼽은 적이 있다. 그 때도 글래드웰은 자신이 찾는 책의 주변에 꼽혀있는 책들을 살펴본다고 했다. 우연히 서로 다른 아이디어가 만나는 지점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게 되고, 이것이 새로운 책의 소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여행 중 여유롭게 서점에 들어갈 때면 항상 주문을 외운다. 오늘도 뜻하지 않은 운명을 만나게 해달라고. 실제 도쿄와 교토의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책은 내 사업에도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번 파웰 서점을 비롯한 시애틀과 포틀랜드에서 사온 책들이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길 기대하고 있다.
“이 많은 책을 다 어디에 보관해야 할까?” 주말에 청소를 하다가 아내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이런 질문과 고민을 계속 던질 것이며, 혹시 책 무게로 책장은 물론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말도 안되는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는 또 책을 계속 사들일 것이다.
이번 여행 중에도 가방이 무거워진 유일한 이유는 시애틀과 포틀랜드에서 사들인 책들 때문이다. 전자책으로 읽어도 되고, 굳이 여행 가방에 실을 필요없이 온라인 주문을 해도 되지만, 우리는 오늘도 서점에 들려 책을 산다. 서점이라는 공간들이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 서점에서 책을 많이 사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음 여행에서는 또 어떤 서점을 가게 될까?
p.s. 파웰 서점 같은 대형서점을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울의 교보 문고를 떠올리게 된다. 교보 문고가 온라인은 몰라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출판사에 광고 매대를 파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큐레이션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책을 사랑해서 교보 문고에 입사하여, 책을 나르고, 꼽고, 판매하던 직원이 성장하여 교보문고의 CEO가 되는 날을 볼 수 있을까?
“Powell's Books CEO to Retire” (Publishers Weekly, 2018. 7. 10)
“Interview with a Bookstore: Powell's Books in Portland” (The Guardian, 2016. 4. 4.)
“Powell’s Books CEO reflects on her career, reading habits and why she loves books” (By Hannah Boufford, The Oregonian, 2018. 11. 30)
“Owner, new CEO of Powell's Books see strength in brick and mortar” (By Elliot Njus, The Oregonian, 2013. 4. 25)
“PORTRAIT OF A BOOKSELLER Portrait of a Bookseller: Miriam S.” (by Powell’s Books Blog, 2017.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