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여행 #11
[시애틀, Il Corvo]
엄청나게 맛있는 레스토랑은 찾기 쉬울 것이다. 가격이 아주 싼 음식점도 찾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맛있는데 싼 레스토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1시부터 3시까지 영업을 하며 예약도 받지 않는 수제 파스타집 일 코르보(Il Corvo). 정말 딱 11시 10분에 도착했는데 이미 한 블럭을 돌 정도로 줄이 이어져 있다. 일정이 바쁜 관광객이나 여행자라면, 이 줄에 합류하기를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먹기 위해' 떠나온 우리는 다르지 않은가! 버티는 거다.
꼬박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려 우리 차례가 왔는데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먼저 주문부터 해야 한다. 계절과 재료에 따라 매일 3종류의 파스타를 선보이는데 그중 무엇을 먹을지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다. 이미 자리를 잡고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니 고민이 더 커진다. 파파델레 면에 볼로네즈 소스, 마팔딘에 잠두콩잎과 허브 페스토, 매콤한 새끼 문어와 케이퍼를 올린 깔라마체티... 결단력 있는 H가 외쳤다. "셋 다 먹자! 안티파스타를 안 먹으면 되잖아." 아, 이런 현명한 해결책이라니. 파스타 세 종류라면, 파르마햄과 케일 샐러드 정도는 얼마든 포기할 수 있어!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는데,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미국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모르는 사람과 테이블을 나눠 앉는 것은 이곳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자리를 잡고 셀프서비스로 포크와 나이프를 챙기고, 물을 가져오고 결연한 표정으로 파스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마침내 나온 파스타들은.... 화려한 장식이나 세팅이나 엄청난 고민을 곁들이지 않아 단순한데 맛있다. 진한 볼로네즈 소스는 넓적한 면에 착 달라붙어 맛있고 마팔딘은 완전히 건강한 맛인데 지루하지 않다. 조금 짭짤한 깔라마체티가 입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세 가지 시켜 먹을 만큼 먹고 남길 예정이었는데, 결국 다 먹고 말았다. 양이 적지도 않았는데, 배도 불렀는데, 맛있으니까. 이렇게 하고도 한 접시 당 9.95 달러. 한국 돈으로 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다. 3만 원에 육박하는 강남의 파스타보다 훨씬 맛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여행길이라 그런 걸 거야, 오래 기다려 배고팠나 봐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했지만 뭐, 그냥 맛있는 거였다.
이 레스토랑은 마이크 이스턴(Mike Easton)과 빅토리아 디아즈(Victoria Diaz) 부부의 작품이다. 16세부터 레스토랑에서 일을 해온 마이크 이스턴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요리를 공부하기에 이른다. 각기 다른 맛과 질감과 모양의 파스타에 반한 그는 계절에 맞는 재료와 소스를 연구했지만 1999년 시애틀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잠시 레코딩 엔지니어 일하게 된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카페에서 일하며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푸기도 했다고. 이후 작은 카페를 사들여 운영 하기도 하고, 레스토랑의 셰프를 하는 등 여러 일을 하며 자신의 레스토랑을 준비했다. 오래 연애한 아내를 파트너로 레스토랑을 내기로 하며 '음식에 대한 열정을 발휘하는 동시에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 결과 점심에만 문 여는 일 코르보가 탄생했다.
일 코르보 파스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 덴테'. 사람들은 단지 살짝 단단한 식감을 알덴테라고 오해하는데 사실은 좋은 식재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유기농 세몰리나가루, 밀가루, 신선한 자연산 계란이 어우러져야 그 속에 든 단백질들이 적절한 ‘심’을 세워 알덴테가 된다고 한다.
한 시간 반 기다려 30분 파스타를 먹고 나오는 길, 여전히 레스토랑 앞에는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점심을 맛있게 먹어 한참 너그러워진 우리는 아직 파스타를 먹지 못한 사람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길 건너편 시애틀 공공도서관으로 향했다. 배를 채웠으니 머리도 좀 채워볼까. 217 James St, Seat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