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떠나 12시간 만에 보스턴 공항에 도착하여, 렌트카를 몰고 메인주 록포트로 향했다. 작년에 한 달간 머물며 메인 통신을 25번까지 썼는데, 올해도 이어서 몇 편 쓰게 되었다. 보스턴에서 록포트까지는 3시간 반에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시차도 있고 잠시 쉴 겸 중간에 포틀랜드 아트 뮤지엄(PMA: Portland Museum of Art)에 들렀다. 작년에 한 달간 머물며 두 번 왔던 미술관이라 세 번째 오니 더 익숙했고, 작품들의 절반 정도는 작년에 보았던 그대로 있었다. 이미 봤던 그림이지만, 다르게 다가오는 몇 점의 추상화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최근에 읽었던 책 때문일 것이다. 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켄델은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를 통해서 뇌과학자의 눈으로 본 현대미술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나는 영화는 SF나 초현실적인 작품보다는 다큐멘터리나 사실에 근거한 작품을 좋아하는 반면,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 회화처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쪽의 구상미술보다는 현대의 추상미술에 더 이끌린다. 미술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데 그냥 추상화에 더 끌리는 편이다. 에릭 켄델의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구상화와 추상화의 차이를 뇌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넘어가는 데에는 몇 가지 주목할 장면들이 있었다. 첫째, 1877년 달리는 말의 사진 한 점이 당시 구상화를 추구하던 화가들을 절망시킨 것이다. 도저히 사실적 묘사에 있어 회화가 사진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둘째, 음악은 자연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데, 왜 화가들에게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라는 요구가 있어야 하는지 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1905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서 굳이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럼 구상화와 추상화가 우리 뇌와는 어떻게 관련이 되는 것일까? 우리 뇌의 회로에서는 상향정보(bottom-up information)와 하향정보(top-down information) 작용이 있다. 상향정보는 뇌에 있는 보편적 규칙과 관련된다. BTS를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이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BTS다!"라고 할 것이고 더 열성팬이라면 "BTS의 누구다!"라고 알아 보게 된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는 이런 상향정보가 작동한다.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와 같은 구상화는 주로 상향정보가 처리하게 된다.
반면 뚜렷한 얼굴이나 사람, 대상과 같은 정보 뿐 아니라 당혹스러운 정보를 감각을 통해 받게 되는데, 이러한 모호한 정보를 ‘개인의 심리’라는 맥락에서 처리하는 것이 하향정보의 기능이다. 상향정보는 모두가 BTS를 BTS라고 알아보지만, 하향정보는 같은 대상(주로 모호한 대상)을 놓고도 사람 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추상화를 뇌에서 처리하는 것이 바로 하향정보이다.
추상화를 볼 때 관객들은 하향정보를 통해 개인의 과거 경험과 기억, 다른 데에서 본 작품 등을 떠올리며 보다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화가가 그려놓은 추상화는 구상화보다 관객의 참여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에릭 켄델은 추상미술 작품이 우리에게 미술,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한다. 언젠가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유명해진 김영민 교수가 "글을 잘 쓰고 싶으면 현대미술관에 가라"고 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이유가 보다 명확하게 이해된다. 현대 미술관에 가서 추상미술을 접하는 것은 결국 매일 똑같은 사무실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비슷한 이메일과 정보를 받으며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재창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겠다는 마음에 이 추상작품들과 더 오래 대화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