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된다구요...?"
말쑥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는 식권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지난 금요일 동대문도서관 지하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다. 할아버지는 카운터를 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알밥에서 김치를 빼줄 수 있는지 물었고, 아주머니는 "아니 알밥에 김치를 빼면 심심해서 어떻게 먹어요!"라고 따지듯 말했다.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의 표정으로 짐작하는 듯했는데 주문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몇 번을 되물었다. 김치를 빼고 알밥을 주문하고 싶은 할아버지와 심심해서 어떻게 먹냐는 아주머니의 대화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돈까스를 먹고는 입가심으로 초컬릿을 사려고 줄 서 있던 나는 이 장면을 보다가 아주머니에게 "할아버지께서 이유가 있겠지요. 원하시는 대로 드리면 어떨까요?"라고 말을 건넸고, 아주머니는 포기한 듯 주방으로 가서 김치를 빼고 알밥을 하나 내 달라고 주방에 말했다. 할아버지는 원하는 알밥을 먹을 수 있었다.
사회심리학에는 '소박한 현실주의(Naïve realism)'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하는데, 이런 경우 자신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이상하거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도서관에서 밥을 먹게 된 것은 저녁 도서관에서 <사람일까 상황일까> 강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에서 소박한 현실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식당에서 목격한 풍경을 예로 들었다. 식당 카운터 아주머니에게 알밥은 '상식적으로' 김치가 곁들여져야 하는 음식이었고, 따라서 김치를 빼고 알밥을 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요청이었다. "어떻게 김치를 빼고 알밥을 먹지?" 정도가 그 아주머니의 생각이었으리라.
사람들의 취향은 내가 생각하는 범위보다 훨씬 다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알밥에서 알을 빼고 김치만 넣어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취향을 위해 그 이유를 내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건강상 이유로 김치를 안 먹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론을 배우는 것이 현실에 어떤 소용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소박한 현실주의'라는 용어의 뜻을 알고 나면, 내가 이해 못하는 사람의 행동이나 취향을 마주할 때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소수의 취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거나 혹은 누가 다수인지 소수인지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있는 그대로 쿨하게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