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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Nov 09. 2019

소박한 현실주의(Naïve realism)에 대하여

"안된다구요...?"

말쑥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는 식권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지난 금요일 동대문도서관 지하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다. 할아버지는 카운터를 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알밥에서 김치를 빼줄 수 있는지 물었고, 아주머니는 "아니 알밥에 김치를 빼면 심심해서 어떻게 먹어요!"라고 따지듯 말했다.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의 표정으로 짐작하는 듯했는데 주문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몇 번을 되물었다. 김치를 빼고 알밥을 주문하고 싶은 할아버지와 심심해서 어떻게 먹냐는 아주머니의 대화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돈까스를 먹고는 입가심으로 초컬릿을 사려고 줄 서 있던 나는 이 장면을 보다가 아주머니에게 "할아버지께서 이유가 있겠지요. 원하시는 대로 드리면 어떨까요?"라고 말을 건넸고, 아주머니는 포기한 듯 주방으로 가서 김치를 빼고 알밥을 하나 내 달라고 주방에 말했다. 할아버지는 원하는 알밥을 먹을 수 있었다.


사회심리학에는 '소박한 현실주의(Naïve realism)'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하는데, 이런 경우 자신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이상하거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도서관에서 밥을 먹게 된 것은 저녁 도서관에서 <사람일까 상황일까> 강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에서 소박한 현실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식당에서 목격한 풍경을 예로 들었다. 식당 카운터 아주머니에게 알밥은 '상식적으로' 김치가 곁들여져야 하는 음식이었고, 따라서 김치를 빼고 알밥을 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요청이었다. "어떻게 김치를 빼고 알밥을 먹지?" 정도가 그 아주머니의 생각이었으리라.


사람들의 취향은 내가 생각하는 범위보다 훨씬 다양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알밥에서 알을 빼고 김치만 넣어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취향을 위해 그 이유를 내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건강상 이유로 김치를 안 먹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이론을 배우는 것이 현실에 어떤 소용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소박한 현실주의'라는 용어의 뜻을 알고 나면, 내가 이해 못하는 사람의 행동이나 취향을 마주할 때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소수의 취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거나 혹은 누가 다수인지 소수인지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있는 그대로 쿨하게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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