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구라시키 여행
3박 4일 쿠라시키 여행이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평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와 곳곳에서 만나는 작고 예쁜 공간들 덕이었다. 쿠라시키에 간다면 꼭 가게 되는 곳이 오하라미술관. 쿠라시키 출신의 성공한 기업인인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만들고 그 후대로 이어가며 소장품을 보완해서 오늘날에는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 최초ㅠ사립미술관이다. 쿠라시키방직, 주고쿠은행, 주코쿠전략 등 당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사업체를 운영했던 친구이자 화가였던 고지마 도라지로의 조언으로 다양한 작품을 사들인 것이 미술관의 시작이었다.
입장권을 사고 나면 본관 앞에서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과 '세례자 요한' 동상을 만날 수 있다. 2차 대전 때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동상과 불상 등을 공출했는데 오하라 가문에서 지켜낸 덕에 오카야마 현에서 공출되지 않고 남은 7개 동상 중 두 개라고. 그리스 신전을 본뜬 본관은 서양작품 위주로 전시되는데 마티스와 모네의 수련, 모딜리아니의 초상 등 유명 작품이 다양하게 전시된다. 가장 중요하게 대접 받는 작품은 역시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 당시에는 대중에게 덜 알려졌던 작품인데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어서 살 때부터 이런저런 고생을 했다는데, 그때의 투자와 모험이 성공해서 오늘날에는 이 수태고지를 보기 위해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본관 2층 위쪽 벽에는 벨기에 작가 레온 프레데릭의 '모든 것들은 죽지만 그러나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를 통해 소생할 것이다'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 걸려 있다. 제목이 긴 것처럼 작품 자체도 대작인데 볼수록 심란한 마음이 든다. 전쟁과 죽음, 인간의 어리석음과 구원을 표현한 그림이라는데 이 작품을 걸기 위해 미술관 전시실의 폭을 고려해 설계했다고 한다. 본관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 신케이엔을 들려야 한다. 오하라 가문의 별장이었던 것으로 넓은 다다미방에서 잘 만들어진 정원을 즐길 수 있다.
분관은 근대 건물로도 매력적이다. 일본작가 작품과 현대미술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공예관. 붉은 벽의 독특한 외관을한 이 건물은 에도 시대 상인의 저택을 모티프로 삼아 설계한 것이라고. 진열장에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조선 반닫이가 눈에 띈다. 일본 민예 운동의 중심 인물들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보니 그런 듯. 야나기 무네요시와 버나드 리치, 아사카와 타쿠미, 가와이 칸지로, 하마다 쇼지의 도자기 작품에 세리자와 게이스케의 염직물과 패턴 디자인, 무나카타 시코의 판화 작품이 작가별 공간에 잘 전시되어 있다. 본관만 보고 나간다면 이 멋진 작품들을 놓칠 수 있으니 꼭 시간을 넉넉히 잡고 세 전시실 모두 돌아보시길. 전시실 내 촬영은 모두 금지다.
1930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에는 관람객이 한 명도 없는 날이 많았다는데 90년이 지난 지금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 관광객을 불러모아 쿠라시키 관광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대단히 앞선 투자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