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남지사 안희정과 그의 비서였던 김지은, 영화감독 홍상수와 배우 김민희. 근 몇 년간 한국에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남녀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둘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현재 진행형인 후자 쪽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된다. 홍상수와 김민희는 일반인이 아닌 예술가이며, 둘의 로맨스는 곧 예술가들의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남녀의 만남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비난의 글을 그 위에 하나 보태는 것은 아마도 의의를 찾을 수 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 글이 불륜을 옹호하려는 의도를 품은 것 역시 아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잠시 유보하고 로맨티스트의 관점에서 ‘김민희를 만난 이후’ 홍상수의 작품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홍상수는 사랑꾼이다. 최근작 “강변호텔”에서 죽음을 예감하는 시인 영환은 두 아들에게 말했다. “미안한 것 때문에 인생을 살 수 없겠더라고. 사람이면 진짜 사랑을 따라가야지.” 아마도 영환의 말은 곧 홍상수의 신념이며, 철학일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인간이란 사랑하는 존재, 사랑 없이는 숨 쉴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홍상수는 영화 바깥의 현실에서 자신의 믿음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보기 드문 예술가이다.
2017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기자 간담회에서 홍상수는 말했다. “저희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고요. 진솔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 김민희도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만남을 귀하게 여기고 믿고 있습니다. 진심을 다해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기된 의혹을 모두 인정했던 대담한 태도는 훗날 전설로 남게 되었다. 서로를 갈망하는 이 굳건한 애정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세상의 모든 부정적 여론을 사소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홍상수와 김민희는 서로를 “진솔하게”, “진심으로” 사랑한다. 누구나 둘의 사랑을 나무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두 방향의 사랑이 존재한다. 홍상수를 향한 김민희의 사랑, 김민희를 향한 홍상수의 사랑. 구태여 분리해보는 것은 두 사랑의 크고 작음을 재보기 위함이 아니다. 함께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그들의 역할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배우 김민희는 카메라 앞에 선다. 감독 홍상수는 카메라 뒤에서 연출한다. 김민희를 사랑하는 홍상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김민희를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홍상수는 왜 김민희에게 매혹되었을까. 김민희의 어떤 점이 홍상수를 사로잡았을까. 인간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일은 짧은 글에서 모두 묘사할 수 없다. 대신 홍상수의 분신인 영화를 통해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는 있다. 함께 작업한 첫 작품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동일한 구도로 반복되며 감탄을 자아내는 김민희의 오른쪽 얼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우수에 젖은 채 해변에 홀로 서있는 그의 뒷모습, “강변호텔”에서 멍하니 모텔방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자태. 마치 페티시를 갖고 있는 듯 배우의 정면보다 측면 얼굴과 뒤태에 경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다시 보면서 나는 홍상수의 입장이 되어봤다. 내가 사랑꾼이면서 영화감독인데, 만약 저 미모의 김민희가 작품에 출연해 눈 앞에 있었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휴머니스트로서 나는 홍상수를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없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말을 빌려 ‘에로스’에 대해 정의했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대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대상과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디오티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상을 ‘지혜’라고 했지만, 김민희가 곁에 있는 홍상수는 아마도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김민희를 바라보는 홍상수의 눈이다. 그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홍상수의 호기심은 인간의 고유한 아름다움에 다가간다. 이것은 전작인 “화차”, “연애의 온도”, “아가씨”에서는 마주하기 힘들었던 종류의 것으로, 여배우이기 이전에 자연인 김민희가 소유하고 있는 매력이다. 이는 연출되고 치장된 형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수수함, 꾸며지지 않은 인간의 소박함이다.
오늘도 어디선가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은 행복한 순간을 셀카로 남긴다. 이때 셀카 촬영은 개인 SNS에 게시해 주변인들에게 자랑하거나 시간이 흐른 후에 꺼내보면서 그때 그 순간을 추억하기 위함이다. 이는 공간과 시간의 ‘기록’이라는 특정한 목적을 갖는다.
영화감독이 작품을 연출할 때, 실제 사랑하는 연인을 사각의 프레임에 담는다는 것은 사적인 기록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왜냐하면 그의 연인은 그의 눈에 비친 가장 아름다운 대상, 즉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최상의 재료를 갖고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이므로 이는 한 예술가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홍상수를 스쳐간 수많은 뮤즈가 있었다. 엄지원, 예지원, 문소리, 고현정, 정유미, 정은채 등. 홍상수는 분명 그의 여배우 모두를 아꼈다. 하지만 김민희는 보다 특별하다. 단순히 홍상수가 인생의 결단을 내리도록 이끌었기 때문이 아니다. 김민희는 그의 영화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은 정서적인 강렬함으로 가슴 가장 깊숙한 곳이 뭉클해진다. 때로 순수한 아름다움에 화면이 일렁거리기도 하고, 때로 애수로 가득해지기도 한다. 김민희는 홍상수의 예술적 야심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배우처럼 보인다.
김민희는 홍상수의 삶에 궁극의 뮤즈일 것이다. 화가 피카소와 함께 머물면서 그의 창작력을 활활 타오르게 했던 7명의 여인처럼. 관객이 화면에서 마주하는 김민희는 홍상수가 일상에서 바라보는 김민희이다. 사랑꾼 홍상수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김민희를 속속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남자일 것이다. 스크린 속 김민희의 아름다움은 홍상수의 사랑이 투영된 결과이다. 그것은 아직 사랑이 식지 않은 연인 관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서, 자세하게 관찰할 때 발견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를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김민희를 향한 홍상수의 사랑이다.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행복해진다. 현재 홍상수는 행복할까? 그건 본인만 알 수 있겠지만, 확실한 건 홍상수는 작품 속에서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