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홀수 연도에만 독서노트 결산을 해왔다. 21년과 23년 연말에 썼던 글을 읽으며 2년을 주기로 관심사가 어떻게 바뀌어 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남긴 기록을 읽다 보면 확신에 찬 말투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분야에 열정적이었던 기록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글 역시 미래의 나에게 어떤 부끄러움을 남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써보는 것으로.
1월부터 7월까지 읽은 책을 정리했다. 일곱 달 동안 15권의 책을 읽었다. 올해부터 해외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읽고 많이 쓰자고 결심했지만 다독하지는 못했다. 대신 독서의 의미를 확장해보고자 했다. 일상을 함께했던 세 권의 책을 정리했다.
요리하며 읽은 책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심리학자이자 웹툰을 그리는 이서현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연애와 결혼 생활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서현 작가의 그림일기를 알게 된 것은 10년 전,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였는데 '서늘한여름밤'이라는 블로그에는 작가님이 일, 가족, 배우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바를 친근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상툰이 올라왔다.
블로그에 비정기적으로 연재되는 그림일기를 읽으며 이전에는 한 번도 고민해 보지 못한 감정의 세계를 만났다. 웹툰 속 작가님의 내밀한 감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존재하는지 몰랐던 마음속 응어리와 소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낯설고 자유로웠다.
올 초에 이서현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우연히 찾게 되면서 다시 그림일기를 보고 있다. 작가님이 그간 겪어온 내면의 변화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라는 욕심에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요리를 하는 동안 이북리더기를 통해 음성을 재생시켜 이 책을 읽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애처롭고 용기 있는 제목에 호기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도 언젠가 커다란 상처를 남기겠지'라는 방어적인 태도로 관계를 이어가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이야기가 많았다. 책을 읽으며 이해할 수 없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사랑받고 싶다는 당연한 마음이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란 물음으로 옮겨가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를 구함으로서 상대를 구하는 관계'라는 표현이 진부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 책을 자주 꺼내보고 싶다.
여행하며 읽은 책
혼모노
이북 리더기를 처음 사용해 보고 있다. 가볍고 눈 피로가 덜한 이북 리더기를 사용하며 전자책 독서의 질이 이렇게나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을 갈 때도 큰 부피를 차지하지 않고 전원이 오래가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여름휴가를 가면서 다운로드하여 간 책은 성해나 작가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 <혼모노>였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갈 때마다 피드에서 마주치는 책의 표지를 보면서 책의 대중적인 감성이 궁금해졌다. 완독 하고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글은 '스무드'였다.
"누구나 제프의 작품을 좋아했다. 제프의 작품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었다. 바버라 크루거나 뱅크시의 작품처럼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전지식 없이도 감상할 수 있고 뭘 안다고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그런 매끈한 세계를 추앙했다."
책 속 문장처럼 매끈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재미 한인 3세 주인공 듀이는 업무 일정차 한국에 오게 된다. 우연히 태극기 집회 참가자와 한때를 보내게 되면서 오해가 오해를 낳는 이야기를 블랙코미디로 엮었다.
전개되는 소설 속 이야기는 분명 유머러스한데 내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매끈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나의 인식 속에서 매끈한 세계와 울퉁불퉁한 세계의 경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카페에서 읽은 책
마음 해방
최근 가장 집중해서 읽은 책이다. 책 속으로 열심히 도망을 가는 때가 있는데 <마음 해방>을 읽을 때가 그랬다. 방송인으로 많이 알려진 곽정은 작가의 책이다.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고 이후 초기 경전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며 깊이 공부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존재한다는 것에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진실을 목도하고 이 제한된 몸과 마음에 자신을 가두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오래된 말은, 고통의 순간을 괴로움으로 확장시키지 않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읽는 동안 커다란 해방감을 주었던 문장이었다. 앞 문장의 통찰에 공감하며 밑줄을 긋다가 뒷 문장의 따뜻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책에서는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이 첫 번째 화살이라면 그 고통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은 성장일 수도 있고 내가 나를 향해 쏘는 두 번째 화살이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화살은 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두 번째 화살은 아무런 의심 없이 쏘아대고 있는 나를 마주할 때가 많다.
그런데 심리학과 관련한 책을 읽을 때면 지금 내가 현실에서 겪는 고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더 높은 집중력을 가지고 읽게 된다. 빠르게 해답을 찾겠다는 태도가 오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책의 내용으로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