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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n 18. 2020

현대인의 상호 냉담성

영화 『타인의 삶』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Mjtu9IAUur4


*본 포스팅은 딱히 영화 리뷰 포스팅은 아닙니다. 시청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도시의 현대인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저마다 맡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아가죠. 이를테면 버스 기사님께서는 손님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운전을 해주시고요, 편의점 점원은 손님에게 돈을 받고 물건을 계산해줍니다. 그것이 각자의 역할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현대의 부정적인 속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껏 사람들이 맡아온 저마다의 역할에서 사람은 제거되고 역할만 남게 된 거죠. 예를 들어 우리에게 택시 기사님은 더 이상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역할만 수행하는, 즉 기능적 존재일 뿐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이 마주한 타인은 한 명의 존엄한 인격체라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기능에 전락했다는 거죠. 하지만 나태주 시인은 이야기했습니다. 오래보아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말이죠. 모든 타인을 기능으로만 대하는 작금의 현대인에게 다시금 인격적 관계의 회복을 꿈꾸게 만드는 오늘의 영화 <타인의 삶>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1984년 동독입니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독은 비밀경찰, 이른바 슈타지를 통해 수많은 국민들을 도청하고, 감시했는데요. 이는 혹여나 국민들이 불순한 사상을 논의하여 국가 질서에 반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극 중 비즐러는 슈타지 중에서도 꽤나 실력을 인정 받는 요원입니다. 그는 늘 상대의 심리를 깊이 파고들 줄 알았고, 따라서 그에게 고문당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즐러는 중대한 임무를 떠맡습니다.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임무입니다. 그는 드라이만의 집 곳곳에 도청기를 설치하였고 드라이만의 삶을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비즐러에게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드라이만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며 지금껏 자신이 잃어버린 인간적 가치들을 다소간 마주하게 된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고, 끝내 영화의 절정에서 그는 드라이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영화는 타인와의 관계 맺기에 대한 철학을 아주 은근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자명하게도 공동체 사회에서 인간은 저마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갑니다. 이를테면 비즐러가 슈타지로서 국민들의 삶을 철저히 감시해야만 했던 것처럼 말이죠. 비즐러에게 드라이만은 살아 숨쉬는 인격체라기 보다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비즐러는 변화합니다. 그는 드라이만의 내밀한 삶을 들여다보았고, 끝내 드라이만의 열정과 정의감에 매료되었으며, 어느새 드라이만을 응원하게 되었죠.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쯤에서 잠시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저서 <나와 너>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세상과 ‘나-그것’ 혹은 ‘나-너’라는 두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인데요.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 나옵니다. 잠시 후 이 남자는 과연 편의점 직원의 얼굴을 기억이나 할까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턱없이 적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편의점 점원은 그저 계산을 수행하는 기능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그것’의 관계입니다. 즉 타인을 오로지 기능으로만 간주하고, 상대를 객체화하며, 수단이나 도구로만 취급하는 관계라 할 수 있죠. 물론 비즐러 또한 최초엔 그러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피감시자에 지나지 않았죠. 하지만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들여다보며 점점 변화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드라이만의 열정과 정의감에 작은 동경심을 갖게 되었고 남몰래 드라이만과 저 혼자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한 겁니다. 즉 타인의 기능 너머로 타인의 인간성과 인격적 가치 그 자체를 조망할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간 거죠. 바로 이것이 ‘나-너’의 관계입니다. 타인을 더 이상 도구도 수단도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하는 관계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타인과 ‘나-너’의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영화 <타인의 삶>은 그 답으로 ‘시선’을 제안합니다. 좀 더 풀어 말하면, 타인의 삶을 정성스레 조망하라는 거죠.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응시함으로써 마침내 그를 둘러싼 기능이라는 외피를 벗어 던지고 한 인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인간은 꾸준한 시선 속에서만 비로소 발견되는 존재입니다. 물론 수많은 인구가 밀집하여 살아가는 도시 환경 속에서 우리는 모든 타인에게 일일이 시선을 건넬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핑계 아래 마냥 숨어버리기엔 우린 이미 너무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것’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가령 직장 동료라던가, 혹은 학교 선후배, 심지어는 친구나 가족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타인을 단지 기능으로만 취급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국민들의 공분을 샀던 경비원 폭행 사건 역시 타인을 기능으로 대한 인간의 최후는 아닐까 싶습니다. 타인을 ‘그것’으로 여긴 나머지 미처 ‘그것’ 아래 숨은, 사람 그 자체는 발견하지 못 한 거죠. 따라서 우리는 비즐러의 시선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타인은 저마다의 찬란한 삶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삶은 나의 진지한 시선 속에서만 발견되는 법입니다. 이름이 호명됨으로써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이야기처럼, 혹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신의 말처럼, 아무쪼록 타인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발견할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가득한 사회를 소망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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