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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y 30. 2020

"사랑이 논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모를 땐"

『1984』,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전체주의 사회가 한 개인에게 끼치는 암울한 전망을 절절히 그려낸 디스토피아적 소설이다. 전체주의가 무엇인가. 강력한 국가권력이 사회, 문화, 교육 등을 전방위적으로 주도하며 국민의 생활 일반을 조작/감시/통제하는 체제가 아닌가. 전체주의를 외치는 국가에서 진리란 '전체'에만 존재하며 그 안에서 국가 구성원은 한낱 의미 없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1984』를 통해 조지 오웰이 그려 낸 한 개인의 구체적 참상의 과정은 한 개인의 삶을 빌려 사회 구성원 전체의 참상을 드러낸 대유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전체를 비껴갈 부분은 없기에. 그렇다면 자문해보자. 우리는 오늘날 어떤 전체에 몸 담고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극단적 형태의 전체주의 사회인 오세아니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이다. 동시에 그는 오세아니아의 체제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이에 대항할 계획을 꿈꾸는 '각성된' 시민이다. 하지만 작중 오세아니아는 윈스턴 스미스 같은 시민들의 의지를 철저히 짓밟아줄 무기가 있다. 이를테면 '텔레스크린'이라는 일종의 CCTV를 오세아니아의 모든 가정에 설치하여 개인의 생활을 24시간 감시하거나, 가공의 반역자 '골드스타인'을 지어내어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 혐오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기존에 존재하던 단어를 점차적으로 말살하거나 새로운 단어로 대체하여 사상의 빈곤을 꾀하기도 하고, 인간의 기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하여 쾌락을 성벽으로 에워싸기도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감시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반역을 꾀하는 이들을 저들끼리 검열하는 바보 같은 '정의감'을 불태우며, 아주 일부의 단어로 나누는 일상적 의사소통에 만족하고, 사랑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며 살아간다. 오세아니아의 자랑스런 시민으로서,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1984』를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빅 브라더'라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정보 독점을 통해 개인의 생활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는 거대 권력의 사회 통제 수단을 뜻하는 것으로 『1984』 속 허구의 독재자를 가리킨다. 시민들은 이 허구의 독재자 빅 브라더가 텔레스크린 등의 감시 수단을 통해 언제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리라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간다. 정작 빅 브라더가 어떻게 생긴지, 혹은 그것이 사람인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빅 브라더가 보고 있다'는 짧은 외마디 구호에도 절절 매며 말이다. 이처럼 권력은 추상성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시민들의 마음에 공포를 드리우는 법이다. 구체화 된 실체로서 납득되어질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공포를 낳지 못한다. 오히려 계몽 시민을 낳는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즉 공포란 막연함 속에서 더욱 덩치를 불리는 녀석이며, 따라서 빅 브라더라는 허구의 인물은 허구적이기에 공포적일 수 있는 법이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한국은 코로나가 한창이다. 아니 전세계가 그렇다. 온 나라 정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코로나의 확산을 막고자 각고의 노력에 여념 없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그 과정에서 인권 침해에 대한 목소리가--비록 주류 여론은 아닐지라도--들려왔다. 코로나 확진자의 이동 경로 추적 및 공개가 해당 확진자의 사생활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해당 정보의 공개는 필수적이라고 일갈했으며 내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내가 이 대목에서 깨달은 한 가지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것이 『1984』에 드러난 오세아니아와 같이 꼭 극단적 형태로만 존재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일단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국가'가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또한 그 국가 안에 거주하는 무수히 많은 '국민'들이 동일한 '국가 정체성'의 범주 안에 형성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공통으로 따라야 할 헌법적 의무, 혹은 관습적 실천 윤리 등이 부여되기 마련 아닌가. 고로 우리가 매순간 인식하진 못할지라도 근대 국가는 아주 사소한 형태로건 대범한 형태로건 전체주의적 요소를 다소간 포함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가령 온 거리 사방팔방에 달려있는 CCTV를 생각해보라. 오세아니아는 체제 유지를 위한 '감시'를 목적으로 텔레스크린을 설치했다면, 현대 사회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예방' 및 '보호'를 목적으로 CCTV를 설치한다. 물론 이를 통해 국가는 수많은 범죄를 예방했을 것이며, 혹은 이미 발생한 많은 범죄 사건을 검거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세아니아와 현대 국가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CCTV를 대대적으로 설치'할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 그외 또 다른 예로 교육을 들 수 있다. 한 때 어느 대통령은 편향된 역사 교과서들이 시중에 너무 많다는 구실로 국정 교과서를 도입하려 했다. 이처럼 국가는 '편향되었다'라는 해석 권한을 당연스레 행사한다.






강신주 작가는 저서 『감정수업』에서 윈스턴 스미스를 통해 '대범함'이라는 감정을 설명한다. 다음은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에티카』 한 구절이다.


대범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무릇 인간은 계산에 밝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어닥칠 위험을 능숙하게 계산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한다. 이를테면 내가 그 행동을 함으로써 받게 될 불이익, 혹은 하지 않음으로써 받게 될 혜택 등을 매우 기민하게 타산하여 행동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이 같은 기본적인 이해관계의 도식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뛰어드는 괴짜 같은 사람들 말이다. 스피노자는 이들을 '대범한' 사람이라 표현한다. 작중 윈스턴 스미스가 꼭 그에 해당한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는 오세아니아의 전체주의 시스템에 손톱 만큼의 구멍 조차 내지 못하리라는 냉엄한 자기 인식을 했더라면 그는 '행동'하지 않았어야 맞다. 그것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계산'이자 셈법이다. 하지만 괴짜들은 다르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비진리만을 따진다. 앞을 가로막은 것이 비진리라면 목숨 걸고 맞서 싸우는 거다. 도대체 그들은 뭘 믿고 그리도 대범한 것일까?





강신주 작가는 대범함의 가장 효과적인 촉매로 다름아닌 사랑을 언급한다. 윈스턴 스미스가 그만큼 오세아니아 정부에 대항할 용기를 가졌던 것도 줄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 왜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콜슨도 그리 말하지 않는가.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사랑은 우리를 투사로 만들고, 사랑은 우리를 굴복하지 않게 만든다. 사랑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이러한 강신주 작가의 설명은 내겐 다소 빈약하게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대범한 행동을 할 힘을 가진다는 것엔 수긍할 수 있었으나, 사랑과 행동 사이의 관계가 석연치 않았다. 단지 연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대범한 것이 사랑이라고? 문득 황경신 작가의 에세이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이 논리를 극복하는 건 줄 알았지.
사랑이 논리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모를 땐.


그렇다. 사랑에 빠진 윈스턴 스미스에게 오세아니아의 전체주의는 이미 '논리' 조차 아니었다. 윈스턴의 논리는 이미 줄리아로 재편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미 논외 대상인 세계 밖 요소를 극복이고 자시고 할 게 무엇인가. 이렇듯 사랑은 우리의 제일원리를 새로이 창조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오세아니아 정부가 섹스를 금지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국가는 그 국가 구성원이 쾌락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마뜩찮아 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진 국민들은 체제 따위의 위협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생성의 논리 속에서 결합된 둘은 낭만적 주체가 되어 세상과 담을 쌓는 법이다.





소설은 새드앤딩이다. 윈스턴이 결국 굴복하고 죽었으니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지독하리 만치 사실적으로 드러냈을 뿐 슬플 건 없다. 결말에서 주목할 것은 윈스턴의 굴복 자체가 아니라, 윈스턴의 전인격적 굴복을 얻어내기 위한 오세아니아 정부의 편집증적 고문이다. 그들은 윈스턴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고 체제를 인정하기 까지 사형을 미뤘다. 전체주의의 선전이 비껴간 예외를 선례로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전체주의 사회는 개인의 행동 양식만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서와 감성까지 조작하고 통제하길 바란다는 것이 뭐 새로울 것 있겠는가.


소설은 새드앤딩이 아니다. 굳이 슬픈 점을 꼽자면 통제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뿐.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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