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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ug 05. 2020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에밀 뒤르켐, 『자살론』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Ria0bXnYaBI&t=197s




생에 대한 의지가 완전히 소멸한 인간은 최후의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고 맙니다. 홀로 짊어지기엔 너무도 버거웠던 삶을 스스로 내려놓고 마는 거죠.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은 그와 관련하여 참 안타까운 기록을 간직한 나라입니다. 중앙자살예방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05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해 만을 제외한 전기간 동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으며, 심지어 한 해 평균 자살률은 OECD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라고 하죠. 또한, 2018년 통계에 따르면 30~40대와 60대 이상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한국이 단연 선두를 달렸으며, 2016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는 10대부터 30대 인구의 사망 원인 1위가 다름아닌 자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건 그 이유입니다. 왜 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그토록 자살이 만연한 걸까요?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서 진단했던 오늘의 책,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입니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앞서 뒤르켐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인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적 사실이란 ‘개인의 행동이나 사고방식 등을 규정하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구속’을 뜻합니다. 즉 사회적 사실의 중요한 특성은 개인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외재성과, 외부에서 개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구속성으로 정리할 수 있죠. 가령 결혼을 꺼려하는 한 20대 중반의 여성을 떠올려보겠습니다. 만약 그녀가 단순히 결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나, 혹은 이성적인 관심이 전혀 없는 경우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비혼을 선택한 것이며 이는 사회가 나서서 억지로 결혼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뒤르켐에 따르면 이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 사회적 사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으로 인해 신혼집에 대한 로망이 좌절되었다 거나, 또는 결혼 후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혼자만의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거나, 혹은 육아를 여성만의 의무로 간주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거부감으로 비혼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처럼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구속하는 이 같은 요인들을 일컬어 ‘사회적 사실’이라 합니다. 즉 뒤르켐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한 한 여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도 어쩌면 사회적 사실이 만들어 낸 사회 현상일지 모른다는 이야기이죠. 『자살론』의 주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살은 단지 한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개인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로부터 촉발된 사회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살의 유형을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요. 지금부터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이기적 자살
② 이타적 자살
③ 아노미성 자살




1. 이기적 자살



첫번째는 이기적 자살입니다. 뒤르켐에 따르면 이기적 자살은 주로 통합력이 약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자살 형태입니다. 가령 A와 B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A는 가족 간의 유대가 끈끈한 가정에서 살아가고, B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를 잃은 채 홀로 살아갑니다. 이 경우 A는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 통합되어 있으므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겠죠. 다시 말해 통합된 사회는 개인을 통제하고 나아가 개인의 자살을 금지하며, 또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삶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반면 B는 A와 달리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회적 의무를 부여 받지 않습니다. 즉 B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오직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며 만약 그에 실패할 경우 삶의 고통을 인내심 있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B에게는 삶을 강제하는 외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처럼 이기적 자살이란 통합력이 약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스스로의 삶에서 찾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미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나머지 뒤르켐이 말하는 이기적 자살이 조금은 의아하게 여겨질 지도 모릅니다. 자유를 지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은 개인에 대한 사회적 구속을 무척이나 거추장스럽게 느끼기 때문이죠.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한 때 반짝 유행한 어느 책 제목(『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이 시사하듯 현대인들이 소망하는 개인주의는 소속감을 전제한 고독일 때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대학생이라든가, 퇴근 후 선술집에서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직장인을 떠올려볼까요? 이들은 언뜻 보기엔 고립된 존재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들은 각각 대학과 회사라는 사회에 통합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즉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는 언제라도 되돌아갈 조직이 있는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즐기는 고독이라 할 수 있죠. 이와 달리 뒤르켐이 말한 이기적 자살의 적절한 예는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경우나, 혹은 독방에서 홀로 살아가는 노인들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기적 자살은 자기 외부에 헌신할 대상이나 목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자기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하던 끝에 마주하게 된 허무함와 소외, 고독감을 끝내는 자살 형태라고 정리할 수 있죠.



2. 이타적 자살


이어서 두번째는 이타적 자살입니다. 이는 이기적 자살과는 달리 사회의 통합력이 너무 강할 때 발생하는 자살 형태인데요. 뒤르켐은 흔한 예로 군대를 제시합니다. 자고로 군대는 질서와 통제가 미덕인 집단이죠. 따라서 모든 군인들은 저마다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내지는 의무감을 지니며 집단 전체의 목표를 개인의 목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통합력이 강한 집단에 속한 개인은 집단을 위해서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가치로 전락해버리며, 나아가 개인의 행동 원리는 개인 외부에 존재하는 집단의 틀에 맞춰지는 거죠. 이처럼 이타적 자살은 개인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강한 곳에서 흔히 발생하는 자살 유형입니다. 가령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을 것을 종용하는 구시대적 관습이라든가, 종교에 심취한 광신도들의 자살 폭격 테러, 혹은 명예를 강조하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할복 문화 등이 예에 속합니다. 다만 뒤르켐은 이러한 형태의 자살이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죠.





3. 아노미성 자살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아노미성 자살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뒤르켐의 인간관을 살펴봐야 하는데요. 그가 보기에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였습니다. 아울러 욕망은 특별한 제재가 따르지 않는 한 무한을 향해 뻗어간다고 보았죠. 즉 뒤르켐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한한 욕망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만족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한의 입장에서 숫자 1이나 100은 둘 다 터무니 없이 작은 숫자에 불과하듯,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은 아무리 많은 욕망을 실현하더라도 무한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죠.






바로 이런 맥락에서 뒤르켐은 사회의 필요성을 대입합니다. 무한히 욕망하는 인간에게 과연 어디까지 욕망해도 좋을지 경계선을 그어주는 역할이야 말로 사회의 책임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즉 인간은 사회가 규정한 한계 내에서 자기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거죠. 쉬운 예로 결혼을 떠올려볼까요? 뒤르켐이 보기에 결혼이란 성적 관계를 규제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가 없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제어할 외압이 없으므로 자신의 욕망을 무한으로 발산하고자 할 것이고 그 결과 커다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지 모르죠. 하지만 결혼 제도가 존재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가정을 지킬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됩니다. 이처럼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규제하고, 이때 인간은 명확한 한계 내에서만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 국가적인 곤란으로 인해 사회 집단의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면 어떨까요? 이때 인간은 욕망의 제약이 사라짐과 동시에 삶의 목표 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무한한 욕망이란 달성 불가능한 목표이므로 목표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욕망과 질서를 잡아주던 모든 기준이 붕괴된 혼돈의 시대에 발생하는 자살 형태를 아노미성 자살이라 합니다. 삶의 원리와 규범이 모두 무너져 내린 결과 생에 대한 의지 마저 스러지고 마는 거죠.




이상으로 뒤르켐의 책 『자살론』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뒤르켐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철저한 개인주의와 극단적인 집단주의 모두 인간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자유 속에서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곤 하며, 반면 사회적 구속이 강할 땐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에서의 적절한 균형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교훈을 가장 잘 담은 소설 중 하나가 고 최인훈 작가의 『광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중 주인공은 남한과 북한을 차례로 방문하며 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체험하게 되죠. 그의 눈에 비친 남한은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는 곳이었으며, 반면 북한은 개인은 없고 국민만 존재하는 곳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남한 사회는 철저한 개인주의였다면, 북한은 지독한 집단주의가 팽배한 사회였던 것입니다. 최인훈 작가는 이를 각각 밀실과 광장에 비유합니다. 그가 상징하는 밀실이란 개인의 성찰과 사유가 존재하는 내면적인 공간이며, 광장이란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사회적 공간이라 할 수 있죠. 최인훈 작가는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 광장에 (····) 끼기를 원하며 (····)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즉 인간은 홀로 자기만의 밀실에 갇힌 채 살아갈 수도 없고, 반대로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맡긴 채 살아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뒤르켐 식으로 해석한다면 밀실만 가득한 곳에선 이기적 자살이, 광장만 가득한 곳에선 이타적 자살이 발생할 테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 모두가 자유와 의무의 이분법을 넘어 밀실 안에 광장을, 광장 안에 밀실을 가꾸도록 노력할 때 한국 사회는 비로소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 던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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