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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27. 2020

아가페적 실존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h6w1WH0X4CA





인문학 서적을 읽다 보면 수없이 반복되는 주제들을 만납니다. 이를테면 사랑이나 자유, 행복, 정의, 실존 등이 그러하죠. 그 중에서도 특히나 오늘날 현대인들의 폐부를 깊이 찌르는 소재는 단연코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프란츠 카프카가 그의 작품 『변신』을 통해 보여줬듯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현대인은 무수히 많은 사람과 관계 맺지만 실은 외로운 존재이며, 또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사는지 망각한 존재입니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소망이 자리잡게 되었고, 따라서 인문학이 말하는 ‘실존’에 주목하게 된 거죠. 하지만 인문학이 설명하는 실존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기 쉽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실존을 실천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을까요? 처참한 수용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고찰한 오늘의 책,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빈 의과대학에서 정신과를 전공하며 탁월한 정신과 전문의로 성장하게 되죠. 특히나 프로이트와 아들러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프랭클은 그들의 사상을 보다 발전시켜 ‘로고테라피’라는 독창적인 치료법을 창안하기에 이르는데요. 이 로고테라피의 핵심 논리는 인간의 존재 가치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프랭클은 정신적인 불안과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죠. 프랭클이 이러한 생각을 굳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다름아닌 그의 수용생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여느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로 끌려간 프랭클은 지옥 같은 나날들을 보내며 삶의 의미를 상실한 수용수들이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수없이 목격하게 되죠. 그 속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을 통해 이 같은 로고테라피의 핵심적인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고, 또 일상 속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존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삶의 이유를 찾고자 노력하게 되죠. 이를 각각 존재 현실과 존재 지향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태어났다’ 라는 현실에 묶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지향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죠. 따라서 존재의 현실과 지향 사이에는 커다란 공백이 발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없음과 있음, 즉 무와 유 사이에는 도저히 맞닿을 수 없는 무한한 단절이 존재하는 것처럼, 애당초 목적이 없는 존재가 목적을 찾으려고 하니 당연히 그 사이에 공백이 자리할 수밖에 없겠죠. 바로 이 커다란 공백을 메우지 못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프랭클은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삶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인데요. 여기에는 수용소에서 프랭클이 겪은 한 가지 일화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날 한 동료가 프랭클에게 다가와 전 날 밤 꿈 이야기를 하며 3월 31일에는 전쟁도 끝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수용 생활도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3월 31일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동료는 점점 아프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3월 31일이 됐을 때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즉 동료는 3월 31일 딱 하루만을 바라보고 견뎌왔지만 그 최후의 희망이 좌절되자 생명력이 다 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프랭클이 깨달은 바는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야 말로 인간의 원초적 동력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프랭클이 검토한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크리스마스부터 새해에 이르는 일주일 사이에도 수용수들의 사망률이 급격하게 상승했다고 합니다. 즉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인간은 생에 대한 원초적 동력을 잃고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거죠. 따라서프랭클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초의미라 이름 붙이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찾기 위한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러한 의지가 좌절된 사람들은 실존적 공허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울증이나 정신 불안에 이른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른바 로고테라피라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는 실존적 실존적 공허함을 느끼는 무기력한 환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회복하도록 도와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환자들이 생에 대한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거죠.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 프랭클은 세 가지 가치를 제안합니다.







첫째는 창조 가치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이를테면 프랭클은 수용 생활 도중 운 좋게 도망칠 기회가 있었지만 동료들의 정신 건강을 돌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 기회를 뿌리친 바 있습니다. 즉 창조 가치란 내가 맡은 책임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며 남들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죠. 이는 물론 직업을 가리지 않습니다. 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판촉을 맡은 직원이든, 혹은 편의점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이든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기 위한 본연의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한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창조 가치를 성실히 실천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체험 가치입니다. 앞서 살펴본 창조 가치가 능동적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면, 반면 체험 가치란 외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의미들을 다소 수동적으로 체험하는 감성 코드를 말합니다. 가령 자연이라던가 예술, 혹은 사람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들에 담긴 의미를 충만하게 체험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물론 이미 감성이 메마른 현대인에겐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체험 가치에 소홀한 이들은 세상이 주는 감동에도 무디어지기 마련이고, 그 결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도 수그러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섬세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세상에 감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프랭클 역시 그의 동료들과 함께 찬란한 노을 저녁을 바라본 체험 가치를 통해 남루한 수용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태도 가치입니다. 척박한 수용 생활 속에서 프랭클이 절실히 깨달은 사실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더라도 단 한 가지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실존적 자유를 지닌 존재라는 이야기죠. 이는 앞서 살펴봤던 바로 그 공백, 즉 존재의 현실과 지향 사이에 발생하는 커다란 틈에 자기만의 역사를 자유로이 써내려 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프랭클은 로고테라피에 대한 책을 완성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죠. 즉 그는 훌륭한 정신의학자로서 공허한 사람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의미전도사의 역사를 써내려 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로써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프랭클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느끼는 수많은 무기력증과 우울감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었을 때 발생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창조, 체험, 태도라는 세 가지 가치를 실천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라고 주문하는 거죠. 저는 이러한 프랭클의 이론을 접하며 문득 에로스와 아가페에 대한 신학자들의 논의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에로스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 아가페는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으로 정의됩니다. 이를테면 에로스란 상대방이 지닌 외모, 경제력, 성품 등 이미 상대방이 지닌 가치를 쫓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보통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바로 에로스라 할 수 있죠. 반면 아가페란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생성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신학자들은 그 전형적인 예로 성경 속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들고 있죠.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자기를 핍박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기 위하여 십자가 못에 박힙니다. 즉 사랑할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결단한 예수의 아가페적 희생이라 할 수 있죠. 이 이야기를 빅터 프랭클의 관점에서 인간의 실존에 적용해본다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고 생성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고정된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므로 세상이 미리 만들어 놓은 의미를 수동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생성할 수 있는 고유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하며 살아나가야 한다는 거죠. 프랭클의 말 대로 인간은 ‘주어진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삶 속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창조하는 아가페적 삶을 살아 가시길 응원하며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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