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jL0MBG7rGGE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실은 두 세계로 나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발견한 첫번째 세계는 이른바 밝은 세계로서 즉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세계를 가리키죠. 이를테면 돈 버는 능력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이혼을 인생의 오점으로 간주하는 세계, 즉 사회가 못 박은 테두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려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싱클레어가 목격한 또 다른 세계는 이른바 어두운 세계로서 즉 사회가 비정상으로 규정한 세계이자, 충동과 본능의 세계입니다. 쉽게 말해 이는 곧 사회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세계로서, 사회가 만든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모험가들의 세계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도대체 이 두 세계를 구분하는 주체는 무엇일까요? 대체 무엇이 한 세계는 밝은 세계로, 또 한 세계는 어두운 세계로 규정하는 걸까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우리 주변의 일상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오늘의 책,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선윤재’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입니다. 소위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감정 정보를 처리하는 뇌 속의 신경 집합체--가 선천적으로 매우 작게 태어난 윤재는 감정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현저히 떨어졌죠. 따라서 윤재는 무서운 것을 봐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며, 남들의 불행을 보아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이른바 감정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윤재는 싱클레어가 발견한 어두운 세계, 즉 사회가 비정상으로 규정한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 할 수 있죠. 그렇다 보니 윤재는 늘 어머니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윤재가 떠안게 될 삶의 짐을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어머니는 매일 마다 윤재에게 상황별로 적절한 말을 주입식으로 암기시킵니다. 즉 윤재 어머니는 어떻게든 윤재를 정상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쓴 것이죠.
그렇다면 정상과 비정상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흥미롭게도 둘 사이엔 엄청난 위계 질서가 존재하는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비정상은 절대로 정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정상의 범위를 설정하는 권력 자체를 정상 세계가 쥐고 있기 때문이죠.
가령 역사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비정상이라 여겨진 성소수자들을 비정상이라고 박해한 세력은 절대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살아가는 세계, 즉 정상 세계입니다. 비정상 세계가 명확해질수록 정상 세계는 진실로 정상적이라는 당위성이 생기니 말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정상인이란 정상인이기 때문에 정상인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인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윤재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권력은 감정을 느끼는 것만을 멀쩡한 것이라 여기는 정상 세계로부터 나온 거라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윤재의 어머니가 윤재를 교육시키는 모습은 표면적으론 어머니의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있는 그대로의 윤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상 세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정상 세계에서 살아가길 바란다는 점에서 윤재를 교육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현실적인 서사라 할 수 있죠. 아무튼 그렇다면 이제 윤재가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어떤 과정이 필연적일까요? 힌트는 이 책이 성장소설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윤재가 계속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면 그는 끝내 정상 세계에 완전히 포획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겠죠. 즉 윤재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어머니와 이별해야만 합니다.
윤재의 열 여섯 번째 생일날인 크리스마스 이브 때의 일입니다. 윤재와 어머니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바깥 나들이에 나서죠. 그런데 이때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 거리의 한 남자가 그만 윤재의 어머니를 상대로 별안간 흉기를 들고 맙니다. 어린 윤재는 어머니가 낯선 남자에게 당하는 장면을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으며, 이로써 윤재는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되죠. 즉 윤재는 정상 세계의 질서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규칙에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간 윤재를 향한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습니다. 학교 아이들은 윤재의 어머니 사건을 두고 수군수군 대며, 특히 자기 어머니가 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는 윤재를 이상한 아이로 여기며 멀리하죠. 이처럼 정상 세계는 끝없이 비정상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자기들의 세계를 공고하게 다집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윤재를 이상한 아이라고 낙인 찍음으로써 자기들이 정상 세계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는 거죠. 작중 윤재의 할머니는 윤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처럼 정상 세계에서 남과 다르다는 사실, 즉 차이는 차별의 마땅한 이유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윤재는 이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정상 세계로부터 쏟아지는 온갖 비아냥에도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성장의 또다른 요소는 바로 세상에 대한 초연함입니다. 예컨대 정상 세계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혹은 저렇게 살아야 한다 하는 규칙을 끝없이 주문하죠. 만약 윤재가 그에 굴복하여 세상이 원하는 바에 적당히 맞춰 살아갔다면 보다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에 지나지 않았겠죠. 따라서 우리는 정상 세계의 규칙에 복종하지 않는 윤재의 초연함을 통해 비로소 성장의 길목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후 윤재 앞에 새로운 인물이 두 명 등장합니다. 첫번째 인물은 윤재와 같은 반으로 전학을 온 ‘곤이’라는 아이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실수로 미아가 된 곤이는 누가 보기에도 조금은 불량한 아이였습니다. 처음에 곤이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를 짓궂게 괴롭히며 못 살게 굽니다. 하지만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아무런 반응도 없는 윤재의 모습에 곤이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로 둘은 기묘한 우정을 쌓는 사이가 되죠. 윤재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인물은 ‘도라’라는 여자아이입니다. 윤재는 도라와 마주할 때마다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심장의 쿵쾅거림을 경험하는 등 새로운 기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로써 윤재는 곤이와 도라를 통해서 세계를 점차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되죠.
윤재 앞에 등장한 이 두 인물은 홀로 선 윤재가 직면한 두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를테면 곤이는 싱클레어가 직면한 어두운 세계, 혹은 비정상 세계를 가리키며, 반면 도라는 밝은 세계, 혹은 정상 세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죠. 다만 오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 앞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것은 그저 정상 세계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임의의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었죠. 즉 곤이를 불량한 아이로 여기며 비정상이라 규정한 것도, 혹은 도라의 밝은 모습을 치켜세우며 정상이라 규정한 것도 실은 사회가 제멋대로 생산한 허울 뿐인 질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윤재는 곤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정상 세계는 곤이의 불량한 겉모습만 보고 그를 비정상이라 여겼지만, 곤이를 자세히 들여다본 윤재는 곤이의 내면에 깃든 밝은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죠. 이어서 도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즉 세상이 지극히 정상이라 여기는 도라조차도 그 내면 속엔 고통과 아픔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윤재는 사회가 비정상이라 못 박은 곤이의 모습 속에서도 밝은 세계를 봤으며, 또한 밝은 도라의 모습 속에서도 그 내면에 깃든 미묘한 어두운 세계를 발견한 거죠. 그리하여 윤재는 드디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물게 됩니다. 어른들의 말에 곧이곧대로 순종하는 삶이 꼭 정상적인 삶도 아니며, 또한 거칠게 반항하는 폭력적인 아이의 내면도 실은 눈물로 얼룩졌을 지 모르니 말이죠. 그러니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은 결코 인간을 설명하는 수사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윤재가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죠.
시간이 흘러 곤이는 끝내 자신을 비정상으로만 간주하는 세상에 상처 받고 거리의 삶을 살기로 선택합니다. 그 과정에서 곤이를 구하려던 윤재는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며 크게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죠. 그런데 깨어난 윤재를 기다리던 건 다름아닌 윤재의 어머니였습니다.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던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윤재를 부둥켜안았고 윤재는 눈물을 흘리며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윤재가 비로소 감정을 회복하는 외견상 감동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과연 이것을 진정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장소설에 있어 해피엔딩이란 말 그대로 주인공이 성장을 완성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된 사건은 성장의 완성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 그 자체로서 긍정될 수 없기 때문이죠. 아시다시피 윤재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작은 편도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입니다. 다만 사회가 윤재의 편도체를 비정상이라고 해석했을 따름이죠. 따라서 윤재가 감정을 회복하게 된 사건은 감정을 느끼는 것만이 정상이라는 사회적 담론에 마침내 윤재가 굴복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해피엔딩에 가까운 결말은 비록 윤재가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는 무감정한 아이일지라도 그 자체로 윤재를 긍정하고 옆에 있어주려는 사람들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그의 수호천사라 할 수 있는 데미안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적힌 편지를 받습니다.
만약 알 밖의 삶이 전쟁이라면 어쩜 우린 좁은 알 속에서 누리는 작은 평화에 만족하며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규칙에 순종하며,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 따위는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죠. 하지만 데미안은 단호히 말합니다. 알 속에 머무는 삶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삶이라고 말이죠. 따라서 우리가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고작 좁은 알 속의 안락한 평화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정상이라 규정한 알껍질을 깨부수고 마치 전쟁 같은 알 밖의 삶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야만 하진 않을까요. 아무쪼록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에 포획 당하지 않는 여러분의 자유 정신을 응원하며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