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유튜브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GVr4N3Z_XxE
삶을 살아가는 방식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귀를 여는 삶이고, 또 하나는 귀를 닫는 삶이죠. 먼저 귀를 여는 삶이란 순종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즉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과제들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삶으로서, 이를테면 고등학교 졸업 후엔 대학에 입학할 것이며, 대학을 졸업한 후엔 취업 준비를, 취업을 하고 나선 결혼을, 결혼 후엔 자녀 양육을 인생 목표로 삼는 삶입니다. 이러한 길은 무척이나 안정된 길이며, 또한 평화의 길이자,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온 길이라 할 수 있죠. 이에 반해 귀를 닫는 삶이란 저항하는 삶입니다. 즉 세상이 진리라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정말로 그러한지 따져 물으며, 남들이 따르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 납득하는 길만 걸어가는 삶입니다. 이는 물론 불안정한 길이며, 또한 전쟁의 길이자, 오직 소수의 모험가들만 걸어온 좁은 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둘 중 행복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과감히 오직 전쟁의 길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에 이를 수 있다고 외쳤던 오늘의 책,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본격적으로 『데미안』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소개드릴 철학자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니체입니다. 개인적으론 『데미안』을 읽을 때마다 니체의 철학을 떠올리지 않으며 읽기가 힘들 만큼 책 곳곳에서 니체의 흔적을 발견하곤 합니다. 따라서 이번 포스팅에선 니체의 철학을 재료 삼아 『데미안』를 독해해보려 하는데요. 본 포스팅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니체의 철학 몇 가지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입니다. 이는 니체가 그의 초도작 『비극의 탄생』에서 처음 소개한 개념인데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서구 사회에서 각각 합리적 이성과 자유로운 감성을 상징해왔습니다. 즉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 세계라 함은 설명될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며 가령 사회 도덕, 종교적 진리, 혹은 기성 지식과 학문 등이 여기 속한다 할 수 있죠. 다시 말해 이들은 이성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우리에게 늘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주는 사회적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요소란 이성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세계, 즉 자유로운 충동과 감성, 그리고 뜨거운 광기의 세계입니다. 달리 말하면 권위에 저항하며, 진리에 대하여 과감히 의심하는 철학의 세계라 할 수도 있죠.
니체에 눈에 비친 당대의 서구 사회는 오로지 아폴론적 요소만을 찬양하고,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억압하는 사회로 보였습니다. 즉 그가 보기에 사회는 오직 합리적 이성만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충동과 광기는 열등한 악으로,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해왔다는 거죠. 하지만 니체는 두 요소의 대립과 조화야말로 세상의 질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동양 철학에서 음양을 천지만물의 원리라고 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정리하면 우리는 세상을 아폴론적 세계로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세계 또한 우리의 세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이성적 질서 위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광기와 충동의 존재이기도 하다는 말이죠.
이어서 두 번째로 힘에의 의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힘에의 의지란 쉽게 말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뜻하는 개념인데요.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주인의 삶이란 외부의 도덕이 아닌 자기만의 주체적인 도덕을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인간은 이성적일 수도, 혹은 광기를 드러낼 수도 있는 존재임을 살펴봤죠. 그렇다면 대체 어디까지가 이성이고, 어디서부터 광기인 지를 누가 규정하는 것일까요? 왜 일에 미친 사람은 워커홀릭이라 칭찬하지만, 취미에 몰두한 사람은 현실 감각이 없다며 비난 받는 걸까요?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이성과 광기라는 것이 결코 절대적인 정의가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란 그저 사회가 제 멋대로 구축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죠. 따라서 정리하면 인간은 다음과 같은 성장의 단계를 밟습니다.
맨 처음 인간은 부모로부터 아폴론 세계에 대한 교육을 받죠. 어른한테 인사하는 법,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는 법 등의 질서와 예절이 여기 속하죠.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아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 또한 세상의 일부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내면에 있는 충동과 본능을 마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때 아이는 두 세계를 잘 종합해야 하며, 그것이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두 세계는 결코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단지 사회가 만들어 낸 임의의 선과 악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아이는 사회 도덕이 규정한 선악을 넘어서 자신만의 도덕으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죠. 쉽게 말해 아이는 그저 사회가 선으로 규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만의 도덕에 당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말한 주인의 삶, 즉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죠.
끝으로 세 번째는 아모르파티입니다. 이는 국내에선 주로 ‘운명애’로 번역되며, 쉽게 말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인데요. 다만 이 사랑은 단지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운명애란 삶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수한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 극도의 능동적인 태도를 뜻하죠. 그럼 이제 이러한 니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데미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줄거리
작중 주인공의 이름은 에밀 싱클레어입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평범한 소년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가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할 무렵 그보다 세 살쯤 많아 보이는 덩치 큰 소년, 크로머가 나타납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불량한 크로머는 싱클레어에게 꽤나 위협적인 존재였는데요. 싱클레어는 불량한 크로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나머지 그만 터무니 없는 허풍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크로머는 오히려 그것을 약점삼아 싱클레어를 협박하기 시작하죠. 싱클레어는 갈수록 심해지는 크로머의 괴롭힘에 지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마을에 한 소년이 전학을 옵니다. 그의 이름은 데미안이었으며, 어딘가 신비스러운 기운이 엿보이는 소년이었죠.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다가가 왜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냐고 묻습니다. 이에 싱클레어는 그간 있었던 일을 데미안에게 용기 내어 털어놓았고 그 뒤론 신기하게도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죠. 데미안은 학교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학생이었습니다. 특히나 그는 수업 시간에 배우는 성경 내용들에 자주 의문을 갖곤 했는데요. 이를테면 그는 성경 속 최초의 살인자로 기록된 카인을 오히려 대단한 사람이었을 거라 치켜세우기도 하고요, 또한 한 죄수가 죽기 전에 회개한 사건을 비겁한 짓이라 폄하하며, 오히려 죽을 때까지 반성하지 않은 도둑이야 말로 자기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이라고 칭찬합니다. 이러한 데미안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싱클레어는 감히 성경의 권위에 저항하는 데미안의 불경한 해석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데미안에게 동화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싱클레어 또한 마찬가지로 진리의 권위에 저항하는 비판적 의식을 갖게 되죠.
하지만 다시 시간이 흘러 싱클레어는 상급 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둘은 헤어지게 됩니다. 새로 간 학교에서 싱클레어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매일 밤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며 방탕한 나날을 보내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우연히 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소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 이름 붙이고는 그녀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힘입어 그간의 방탕한 삶을 완벽히 정리하죠. 그로부터 얼마 후 싱클레어가 방 안에서 혼자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그릴 때였습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보니 그가 그린 그림 속 얼굴은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꼭 데미안과 닮아 보였죠. 물끄러미 그림을 보던 싱클레어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낸 데미안의 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편지의 내용은 일전에 싱클레어가 자신의 꿈을 해석해달라고 부탁한 데 대한 데미안의 답신이었으며 내용은 이렇습니다.
싱클레어는 불현듯 떠오른 데미안의 편지를 다시금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만 만족스러운 답에 이르진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에게 도움을 줄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의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였으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신학생이었죠. 그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의 편지에 등장한 아브락사스를 설명해주죠. 그에 따르면 아브락사스는 지고의 선인 동시에 극한의 악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시키는 존재, 즉 밝은 세계만을 포용하는 선한 신이 아니라 선과 악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라 할 수 있죠.
이러한 피스토리우스의 이야기에 감명받은 싱클레어는 한동안 그와 만나며 지적 교류를 나누기도 하는데요. 시간이 흘러 내적으로 성장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모두 진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떠나게 됩니다. 다시 시간이 흐른 뒤 싱클레어는 어느 날 데미안의 집을 가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싱클레어는 비록 그 곳에서 데미안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 대신 한 여인의 사진을 보게 되는데요. 사진을 본 싱클레어는 흠칫 놀랍니다. 사진 속 여인은 그 동안 싱클레어가 꿈속에서 보아온 여인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여인이라는 깨달음이 들었기 때문이죠. 사진 속 여인에 대한 싱클레어의 사랑은 성적인 사랑 너머의 고귀하고 순결한 운명애적 사랑이었으며, 삶을 약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싱클레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직접 만날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녀는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죠. 그녀의 이름은 에바였으며, 이미 싱클레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힘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이후로 싱클레어는 에바의 집에서 데미안과 에바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곧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싱클레어 역시 전쟁터로 나서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병원에 입원하여 침상에 눕혀집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보니 옆 침상엔 데미안이 누워있었죠.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바라보며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남긴 데미안은 정말 사라져버렸고 싱클레어는 홀로 남아 부상을 치료하게 되죠.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클레어는 거울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로써 소설은 싱클레어의 독백을 끝으로 막을 내리죠.
『데미안』 해석
이상으로 데미안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에 담긴 니체의 흔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릴 적 싱클레어는 자신의 집에서 두 세계를 목격합니다. 그에 따르면 한 세계는 사랑과 철칙, 교육과 모범의 세계로서, 안정된 삶을 바라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밝은 세계입니다. 반면 또 다른 세계는 무질서하고 폭력적이며, 강한 악취를 풍기는 세계로서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선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어두운 세계이죠.
어린 싱클레어는 이러한 두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두 세계는 니체가 말한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에 꼭 부합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싱클레어가 말한 밝은 세계는 니체가 말하는 이성의 공간, 즉 아폴론적 세계이며, 반면 어두운 세계는 니체가 말하는 광기의 세계, 즉 디오니소스적 세계라 할 수 있죠. 이러한 관점에서 『데미안』을 독해하면 주인공 싱클레어가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고, 마침내 극복하며, 최종적으론 두 세계를 넘어서는 아브락사스적 자유를 누리게 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싱클레어가 맨 처음으로 겪는 중요한 사건은 바로 크로머의 등장입니다. 이는 그동안 안락한 가정(아폴론적 세계)에 머무르던 싱클레어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체험한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죠. 크로머에게 시달리던 싱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크로머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된 싱클레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저 안락한 아폴론적 세계 뿐만 아니라 음침한 디오니소스적 세계로도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는 단 한 번의 거짓말과 충동질만으로도 디오니소스적 세계에 빠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도움 덕분에 크로머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작중 데미안의 기능은 두 세계에서 방황하는 싱클레어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힘이라 정의할 수 있는데요. 이를 니체식으로 해석하면 ‘힘에의 의지’에 해당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뜻하는 것으로, 즉 싱클레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를 십분 발휘하여 크로머의 노예 노릇을 하던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서 과감히 탈출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죠.
다만 안타깝게도 어린 싱클레어는 아직 나약한 존재였고, 따라서 자기 삶의 완전한 주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예컨대 싱클레어는 크로머로부터 해방된 후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죠.
쉽게 말해 데미안(힘에의 의지)은 싱클레어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립적 인간, 즉 두 세계를 뛰어넘은 아브락사스적 인간이 되길 소망했지만, 어린 싱클레어는 기껏 디오니소스적 세계(크로머)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다시 익숙한 아폴론적 세계(따뜻한 가정)로 피신했을 뿐입니다. 아직 싱클레어는 두 세계를 초월하는 진정한 주인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거죠.
그렇다면 싱클레어는 대체 어떻게 해야 힘에의 의지를 충만하게 발휘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실마리는 성경을 대하는 데미안의 태도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데미안은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각각 죄인과 의인으로 다루어지던 카인과 아벨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과감함을 보이는가 하면,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은 도둑을 가리켜 도리어 당당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이라고 치켜세우곤 하죠. 이는 선과 악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따르지 않으려는 저항정신, 니체식으로 말하면 반도덕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개념은 오해가 발생하기 쉬운 대목이므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도덕이란 선과 악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과연 사회가 규정한 선과 악은 절대적 가치일까요?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요소가 짙은 사회에서는 부지런함을 선으로, 게으름을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는 시간관리 비결을 다룬 책들이나, 열심히 살라고 외치는 동기부여 전문가들, 혹은 부지런한 사람들의 성공기를 담은 매체물들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부지런함만이 아폴론적 세계에 속할 수 있다고 공론화하곤 하죠. 그 결과 게으름은 점점 더 사회 밖으로 밀려나게 되며, 심지어는 극복해야 할 악덕으로 굳어집니다.
데미안은 바로 그 같은 도덕 권력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는 왜 카인이 꼭 죄인이며, 게으름이 악덕이어야 하냐고 묻죠. 즉 데미안은 사회가 규정한 선과 악을 비틀기 시작함으로써, 사회가 일러준 도덕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도덕을 확립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싱클레어가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사회가 규정한 선악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선악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주인의 도덕을 따라야 한다는 거죠.
시간이 흐른 뒤 상급학교로 진학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잊은 채 방탕한 나날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데미안과의 이별은 곧 힘에의 의지를 상실한 삶을 뜻하므로 어쩌면 싱클레어의 타락은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르죠. 그러나 다행히도 싱클레어는 스스로의 힘으로 방황을 극복합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그간의 방탕한 생활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싱클레어가 빠진 사랑의 의미를 분석하면 베아트리체는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결합시켜주는 역할이라 해석할 수 있는데요. 사실 여태껏 싱클레어는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단계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예컨대 크로머에게 압도되었을 땐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또한 그로부터 탈출한 뒤엔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아폴론적인 안정감을 만끽했죠. 또한 상급학교로 진학한 뒤엔 또다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 탐닉한 채 시간을 허비했고 말이죠. 하지만 사랑에 빠진 싱클레어는 마침내 두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에게 성적 충동, 즉 디오니소스적 욕망을 갖는 동시에, 그간의 방탕한 삶을 정리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아폴론적 이성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즉 싱클레어는 사랑을 통해 비로소 두 세계를 통합하는 단계로 한 걸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로써 사랑이란 인간의 성장에 필연적 요소임을 헤르만 헤세는 넌지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싱클레어의 성장은 갈 길이 멉니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선 단지 두 세계를 통합하는 단계를 지나, 마침내 두 세계를 초월한 아브락사스적 자유를 누려야 하기 때문이죠. 바로 이때 싱클레어에게 큰 도움을 주는 인물이 피스토리우스입니다. 그는 아브락사스의 의미를 싱클레어에게 처음 알려준 인물로서 싱클레어는 그와 지적 교류를 나누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실마리를 깨우쳐 나가죠.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은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피스토리우스에게 실망한 싱클레어가 그를 마음 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결심한 사건 말이죠. 이것이 싱클레어의 성장에 무척이나 중요한 이유는 자신에게 아브락사스를 가르쳐 준 사람조차 절대적 진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옮긴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알을 깨고 비로소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고 해석할 수 있죠.
소설의 후반부에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을 만나며 운명적 사랑을 느낍니다. 다만 이 감정은 베아트리체에게 느꼈던 성적인 사랑과는 다른, 보다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사랑으로 묘사되는데요. 이는 니체식으로 해석하면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라 할 수 있습니다. 아모르파티란 쉽게 말해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로서, 니체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포용하며, 심지어는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죠. 다만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아모르파티란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분투하는, 그야말로 전쟁처럼 치열한 삶을 의미하죠.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끝머리가 전쟁으로 마무리되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는 곧 삶이란 저마다 스스로에게 이르는 전쟁 같은 길이며, 오직 전쟁을 치른 자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이리하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니체의 철학으로 독해해보았습니다. 작중 피스토리우스는 한창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던 싱클레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들도 꿈속에서 살긴 하지만 그들 자신의 꿈이 아니야.” 이러한 피스토리우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날카로운 말일 겁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통해 날씬한 몸매를 갖기 원하며, 돈을 모아 값비싼 옷을 걸치길 바라고, 한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멋진 아파트를 꿈꾸죠. 하지만 그것들이 진정 우리 자신의 꿈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단지 그것들은 미추에 대한 사회적 담론, 거대 패션 산업의 선전, 여유로운 삶에 대해 매체가 구성한 허구적 이미지는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는 그저 사회가 규정한 아폴론적 세계를 막연히 동경하며 남들의 꿈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물론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핵심은 다이어트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속으로부터 솟아나온 꿈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루하루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지도 모르죠. 헤세는 말합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과연 그의 이야기 대로 세상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도덕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무척이나 어려운 고난의 길입니다. 하지만 고난까지도 끌어안는 아모르파티의 마음가짐과, 마침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힘에의 의지와 함께한다면 언젠가 우리 모두 거울 속의 데미안과 웃으며 만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참고로 데미안은 수호신을 뜻하는 데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부디 이 짧은 글이 잠시나마 여러분의 하루를 비추는 데미안이 되었길 바라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