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준, 『서(恕), 인간의 징검다리』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w5e2sFBHFiA
몸 철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정신과 세계의 교차로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가령 우리가 운동을 통해 기분 좋은 흥분감을 맛볼 수 있는 것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줄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몸은 인간이 현실 세계를 적극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간의 몸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신체를 넘어서는 감각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으니 말이죠. 예컨대 인간은 타인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또한 타인의 생각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타인의 생각은 오로지 타인 그 자신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독립적인 사건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인간은 몸을 통해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했지만 결코 자신의 신체를 넘어서는 경험을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여 타인을 진심으로 공감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도덕적 상상력을 통해 개별적인 동시에 연결된 존재를 제안하는 오늘의 책, 이향준의 『서(恕), 인간의 징검다리』 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즉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먼저 타인을 인정해주며, 또한 사랑받고 싶거든 나부터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죠.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성경구절을 가리켜 ‘황금률’이라 부릅니다. 말 그대로 황금처럼 귀한 잠언, 즉 인간의 도덕 윤리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에 해당하는 말씀이라 여겼던 거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황금률은 고대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었습니다. 바로 공자가 제안했던 ‘서(恕)’라는 개념인데요. 그가 말하는 ‘서’란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앞서 소개한 황금률이 ‘내가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도 ‘베풀라’는 긍정 어법인데 반해 공자가 말하는 ‘서’란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베풀지 말라’는 부정 어법이라 할 수 있죠.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황금률을 보다 우월한 도덕 원리로 간주해왔습니다. 황금률은 능동적으로 선을 베푸는 적극적인 도덕이지만 공자의 ‘서’는 단지 악을 끼치지 않는 데 만족하는 소극적인 도덕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이러한 세간의 인식은 서에 따라붙은 은백률이라는 별칭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금이 은보다 귀한 것처럼, 황금률이 은백률 보다 우월한 도덕 원리라는 인식이 숨어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황금률과 은백률은 둘 다 공통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 다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황금률과 서는 각각 긍정과 부정이라는 외견상 다른 형태를 취하지만 공통적으로 세 단계의 진행 과정을 요구합니다. 첫째로 사태의 인지와, 둘째로 상상적 추론, 그리고 마지막 도덕적 행동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이죠.
먼저 사태의 인지란 말 그대로 상황에 대한 자기 인식을 뜻합니다. 예컨대 황금률을 실천하는 주체는 먼저 자기 자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서를 실행하는 주체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하겠죠.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단계입니다.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앞서 인식한 자신이 바라는 것, 혹은 바라지 않는 것을 타인의 입장에 적용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는 내용인데요. 중요한 내용인 만큼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비난을 듣거나 상처 받길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때때로 타인을 비난하며 상처를 주기도 하죠. 그 이유는 전적으로 ‘나’와 타인이 분리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상처는 결코 나의 상처가 아니므로 나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타인을 섬세하게 대할 필요가 없는 거죠. 즉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상처를 나의 상처라고 상상할 수 있는, 나아가 타인도 나처럼 상처를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추론할 수 있는 상상적 추론 과정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한 주체는 내가 바라는 것을 상대에게 베풀거나, 혹은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상대에게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도덕적 행위를 완성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이 과정에는 매우 위험한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상상력은 얼마든지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죠. 이를 잘 설명하는 훌륭한 사례 중 하나가 장자에 실린 혼돈칠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먼 옛날 북해의 제왕 홀과, 남해의 제왕 숙, 그리고 중앙의 제왕 혼돈이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혼돈의 땅에 모여 시간을 보내곤 했고, 때마다 혼돈은 숙과 홀을 맞아 지극히 잘 대접했죠. 이에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보답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고, 그 결과 그들은 다음의 결론에 가닿았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혼돈에게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주기 시작했고, 일곱째가 되던 날 결국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 가능한 이 혼돈칠규의 이야기는 인간의 도덕적 상상력이 함축한 치명적인 결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숙과 홀은 자신들에게 구멍이 필요한 것처럼 혼돈에게도 구멍이 필요할 것이라 상상했죠.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혼돈에겐 혼돈만의 질서가 있었고 그 결과 숙과 홀의 도덕적 행동은 도리어 혼돈의 죽음만을 불러왔습니다. 즉 인간의 도덕적 상상력은 유감스럽게도 언제든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죠.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상상력의 오류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며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교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류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한 황금률과 은백률은 도리어 폭력적인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르니 말이죠.
인간 사회의 도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모범적인 이상향을 권고하는 도덕과, 공동체에 해악이 되는 내용을 금지하는 도덕으로서, 이른바 ‘좋음의 윤리학’과 ‘나쁨의 윤리학’이라 할 수 있죠.
이 둘을 앞서 살펴본 개념에 적용해본다면, 좋음의 윤리학이란 내가 좋다고 여기는 바를 타인에게도 베풀고자 하는 황금률에 대응하며, 나쁨의 윤리학이란 내가 싫어하는 바를 타인에게 행하지 않으려는 서에 대응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두 도덕 중에서 우리 삶의 보편적인 규칙이 될 수 있는 도덕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마도 그것은 나쁨의 윤리학일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초월적인 ‘좋음’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컨대 혼돈칠규 이야기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숙과 홀이 추구했던 좋음과 혼돈이 추구한 좋음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만약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내가 추구하는 좋음만 타인에게 강요한다면 기어코 참변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초월적 ‘좋음’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기에 ‘좋음의 윤리학’은 보편 도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나쁨의 윤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한 가지 초월적 나쁨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해악’입니다. 자명하게도 인간 사회의 공동체는 ‘타인에 대한 해악을 금지’하는 도덕을 보편 질서로 삼을 때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죠. 즉 우리 모두는 타인으로부터 해악을 당하지 않길 바라듯 우리 자신도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마땅히 필요한 초월적 규범이며, 따라서 나쁨의 윤리학은 우리 삶의 보편 도덕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 거죠.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서는 비록 황금률에 비해 조금은 소극적인 도덕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누구나 실천 가능한 보편적인 도덕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의 책 『서, 인간의 징검다리』를 아주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서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자신의 신체에 갇혀 있다는 한계로 인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별적으로 고립된 존재들이지만,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에게로 건너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물론 타인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언제든 틀릴 수 있는 오류가능성을 함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할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상상력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상상력이라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도덕적 행위를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 그 자체이죠. 즉 우리는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기에 앞서 먼저 도덕적 맥락을 만들어 내야 하며, 도덕적 맥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덕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들릴 지 모르지만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예컨대 집을 나서기 위해 신발을 신는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왼발과 오른발 중 어느 발부터 신는 것이 도덕적일까요? 정답은 ‘상관 없다’ 입니다. 신발을 신는 행위는 도덕적 맥락과 무관하며, 따라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죠. 이처럼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적 맥락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하며,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도덕적 상상력입니다. 무엇이 도덕적 맥락인지도 추론할 수 없는 사람은 도덕적 행위를 실천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이죠. 아무쪼록 기꺼이 타인의 입장이 되고자 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타인에게로 도약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시기를, 그리하여 섬 속에 외따로 존재하지 않으시기를 응원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