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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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우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걸어간다면 잠시 후 아기는 참변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 사람이 우연히 아이를 발견했고, 덕분에 아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은 왜 생면부지한 아이에게 불쌍한 마음을 느끼며 선뜻 돕고자 하는 걸까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신뢰하며 본성의 회복을 통해 이상적인 세계를 꿈꿨던 오늘의 책, 『맹자』입니다.
예부터 동양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뜨거운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그 결과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무악설, 성선악혼재설, 성삼품설 등 다양한 인성론이 자리잡게 되었죠. 익히 알려져 있듯 맹자는 그 중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이야기했던 건데요. 과연 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맹자는 사단을 제시합니다. 사단이란 말 그대로 우리 마음의 네 가지 단초를 뜻하는 것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지 않을 수가 없는 다음의 네 가지 마음을 나타내죠. 각각을 풀이하면 측은지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이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이란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끝으로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맹자는 그 중에서도 우물에 빠지려 하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곧바로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을 근거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맹자의 말 대로 인간이 정말 선한 존재라면 때때로 인간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맹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우리가 마음 속의 사단을 올바로 꽃피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똑 같은 식물을 키우더라도 누군가는 싹을 틔워 열매를 보는 반면, 또 누군가의 것은 시들어 말라 죽기 마련이죠.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선한 마음의 싹, 즉 사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싹을 틔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살 것인지, 혹은 사단을 꽃피우지 못해 악을 저지르며 사는 존재로 남을 것인지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꽃을 피워 얻은 열매를 사덕이라 말합니다. 사단을 열심히 가꾸는 사람만이 사덕을 열매로 맺을 수 있다고 맹자는 말하죠.
사덕을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로 ‘인’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며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나의 고통처럼 느끼는 측은지심의 열매라 할 수 있고요. 둘째로 ‘의’는 옳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며 자기 마음에 당당한 길만 걸어가려는 수오지심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는 겸손하여 사양할 줄 아는 사양지심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그것이 우리 삶의 예절로서 열매 맺은 것이고요, 끝으로 ‘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을 성실히 수행한 결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맹자가 말하는 성선설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이미 선한 존재로서 완성되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내면의 사단을 올바로 꽃피우지 못한 인간은 아직 선한 존재라고 불리울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밖에도 맹자는 성선설의 근거로 양지와 양능을 추가합니다. 양지란 배우지 않고도 아는 지식을 뜻하며, 양능이란 배우지 않고도 능한 행위를 가리키는데요. 가령 우물에 빠진 아이를 도와야 한다는 지식은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양지이며, 나아가 아이를 구하고자 뛰어드는 행위 역시 배우지 않아도 행할 수 있는 양능이라 할 수 있죠.
즉 맹자는 사단과 사덕, 양지와 양능을 통하여 인간이 본래 선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악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곧 사단을 꽃피우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어떠한 수양을 통해 사덕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맹자가 제시하는 수양의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직양, 둘째는 집의이죠. 먼저 직양이란 우리의 선한 마음을 보존하고 확충하는 ‘존심양성’을 뜻합니다. 앞서 소개해드렸듯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 주장했었죠. 따라서 맹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본성 대로만 행동한다면 자연스레 선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선한 본성을 잘 보존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탁월한 성품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탁월한 성품의 인격자를 발견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선한 본성을 방해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자명하게도 인간은 무엇이 선한 행동인 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악을 저지르곤 하죠. 즉 맹자가 말하는 직양이란 끝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욕심을 경계하며 오직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확충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집의란 의로운 일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내면의 선한 본성이 옳다고 여기는 행동만을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우리 일상의 습관들을 선한 방향으로 고쳐 나가는 거죠. 그리하여 우리 내면의 선한 본성과 우리의 행동이 하나가 되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마음이 곧 행동이며, 행동이 곧 마음인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선한 본성을 방해하는 욕심에 유혹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거죠. 이처럼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선한 본성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왕성한 의지를 일컬어 ‘호연지기’라고 합니다. 호연지기가 부족한 인간은 선한 마음을 도외시하고 욕심을 따르기 마련이죠. 따라서 맹자는 직양을 통해 본성을 보존하고, 또한 집의를 통해 본성과 행동을 일치시킴으로써 호연지기를 내뿜는 존재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맹자는 마침내 호연지기가 충만하게 차오른 존재를 일컬어 대장부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대장부란 이로움 보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즉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 보다 천하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덕성이 대장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과연 대장부가 추구해야 할 천하의 의로움이란 대체 무엇을 뜻할까요?
맹자는 왕도정치를 꿈꿨습니다. 왕도정치란 끝없는 수양을 통해 마침내 대장부의 경지에 오른 군자가 덕을 바탕으로 국가를 지도하는 정치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지도하는 패도정치와 대조를 이루는데요. 먼저 왕도정치의 경우 정치의 목적은 백성으로서, 즉 백성은 정치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왕도정치 체제의 왕에게 있어 국가 경영의 목적이란 자신의 덕을 백성들에게 골고루 퍼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죠. 반면 패도정치에서 백성이란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왕은 강력한 패권을 쥐기 위해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자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거나 수탈하는 등 얼마든지 백성을 이용할 수 있죠. 맹자는 그러한 패도정치를 신랄하게 비난하며 오로지 의로움을 앞세우는 왕도정치만이 올바른 정치 형태라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입니다.
맹자는 실제로 백성들을 위한 구체적인 경제 정책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전제’인데요. 이는 ‘우물 정’ 모양으로 밭을 나눠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뜻합니다. 즉 밭을 9등분 하여 이 중 여덟 덩어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국가는 딱 한 덩어리만 소유하는 거죠. 백성들은 자신들이 할당 받은 밭에서 경작한 생산물을 오롯이 독차지 할 수 있으며, 대신 국가 소유의 밭을 경작하여 얻은 생산물을 국가에 헌납해야 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경제 정책을 개발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궁핍한 나라 살림 속에선 제 아무리 인간의 본성이 선할지라도 그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항산 무항심입니다. 풀이하면 재산이 없이는 마음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죠. 이처럼 맹자는 백성들의 실질적인 살림 살이에도 관심을 기울인 민본주의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한 본성을 그 누구보다 신뢰했던 유학자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맹자』의 핵심 개념들을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흔히 비판 받는 지점은 선한 인간이 왜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맹자의 주장을 단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선은 아직 완성된 선이 아니라 개발되어야 할 선이기 때문이죠. 즉 인간은 사단이라는 씨앗을 꽃 피워 사덕이라는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선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사상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의 말 대로 머리로만 아는 것, 가슴으로 느끼는 것, 나아가 발로 뛰어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무척이나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머나먼 여행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맹자로부터 배웠습니다. 먼저는 직양을 통해 선한 본성을 지키고, 또한 집의를 통해 선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거죠. 그리하여 마음이 곧 행동이며 행동이 곧 마음인 경지에 이르면 마침내 우리의 머리, 가슴, 발도 비로소 하나 같은 셋, 혹은 셋과 같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는 머리로만 아는 현학주의를 떨쳐내고, 가슴으로 느낄 줄만 아는 감상주의를 벗어나며, 또한 발만 앞서는 속도주의를 극복하여, 마침내 알고 느끼고 행하는 것을 하나로 여기는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무쪼록 우리 내면의 양심을 잘 단속하여 욕심에 굴복 당하지 않는 여러분의 호연지기를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