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가 묻고 니체가 답하다"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임건순

by 혜윰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oEVhKE7VCXc





고대 중국에서는 유독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이 발달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비롯하여 성선악혼재설, 성무선악설, 성삼품설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했죠. 흥미롭게도 그 이유는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당시 중국의 수많은 나라들은 강력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격동의 시기를 보냈죠. 그에 따라 각 나라의 왕들은 국력의 신장을 위해 보다 많은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했고, 따라서 왕들은 인간의 마음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상가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만 있다면 보다 많은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으리라는 심산이었던 거죠. 이윽고 전국 각지의 수많은 사상가들은 저마다의 이론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 즉 수많은 학자와 학파들이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거죠. 오늘날 큰 화두로 남은 성선설과 성악설도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 본성론 중 하나입니다. 대체 그들은 인간을 무엇이라 설명했을까요? 인간 본성을 둘러싼 제자백가의 목소리를 한데 담은 오늘의 책, 임건순의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입니다.











1. 성선 v.s. 성악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대 중국의 본성론은 태생부터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발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선설과 성악설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요. 결론부터 말하면 성선설은 피지배자의 논리로, 성악설은 지배자의 논리로 활용되기 쉽습니다. 먼저 성선설의 경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선설의 대표적인 사상가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 하는 아이를 발견한 인간의 마음 속에 자연스레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을 근거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도 동정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러한 동정심이 인간에게 가능한 이유는 선천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이죠. 따라서 맹자의 주장 대로라면 인간은 ‘자율적’으로 도덕 주체가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저 선한 본성 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누구나 선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니 말이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성선설은 개인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을 무력화하는 논리로 기능하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구태여 국가가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평화를 유지할 테니 말이죠. 쉽게 말해 ‘선’이라는 것이 인간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면 외부의 ‘선’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반면 성악설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됩니다. 그러한 악한 인간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는 사회적 혼란을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국가 권력이 개입하게 되죠.




예컨대 순자는 교육을 통해 인간의 악한 본성을 다스리고 사회적 본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으며, 또한 한비자는 법을 정비하여 인간들의 나쁜 본성이 발휘되지 않는 환경을 마련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처럼 성악설은 인간의 악한 마음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 즉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기 쉽죠. 그렇다 보니 맹자의 성선설은 당시에도 주류 철학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권력자들이 좋아할 리 없었기 때문이죠. 물론 사정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명하게도 현대 사회의 수많은 제도들은 인간의 선의지를 신뢰하기 보다 악한 의지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발달했죠. 예컨대 삼권분립이라든가, 각종 감사 시스템 등은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를 위한 것으로, 즉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본성에 대한 주류 철학은 성악설이라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과연 성선설은 그저 이상에 지나지 않는 꿈 같은 얘기에 불과할까요?









2. 성선설의 오류와 극복


맹자가 주장하는 성선설의 근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 즉 사단지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 즉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선한 존재라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이러한 논증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측은지심이 선한 마음이라는 전제입니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처럼 전형적인 ‘생략된 삼단논법’의 형태로 정리할 수 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성선설의 불완전함이 드러납니다. 앞서 맹자는 인간이 선한 이유를 측은지심이라는 인간의 감정 때문이라 답했지만, 사실 측은지심을 선한 감정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입니다. 중요한 대목인 만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령 놀람이라는 감정은 선한 감정일까요, 혹은 악한 감정일까요? 이에 대해 우리는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놀람이라는 감정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측은지심이 선한 감정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측은지심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도덕적 이성이 어떤 감정은 선하다, 어떤 감정은 악하다 라는 규칙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이야기이죠. 다시 말해 도덕적 감정은 도덕적 이성의 승인 작업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그 역 또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덕적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이성을 추구하는 마음, 즉 선한 감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죠. 이로써 성선설은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끝없는 순환 논증의 덫에 걸려들고 맙니다. 도덕적 이성과 도덕적 감정이 서로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로 작용하여, 감정을 근거로 내세우는 맹자의 성선설은 그 설득력이 매우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물론 맹자도 이러한 비판을 예측했는지 사단 중 하나로 시비지심, 즉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의 마음을 포함시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순환 논증을 내재화한 것일 뿐,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근원이 감정과 이성 둘 중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맹자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은 감정을 선의지의 근원이 아니라 계기로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측은지심을 통해 도덕적 선택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이를 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고 말이죠. 즉 인간은 감정을 통해 도덕적 선택이 필요한 상황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통해 이른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거죠. 따라서 비록 맹자의 주장처럼 감정이 선의지의 근거는 되지 못할 지라도 도덕적 맥락을 구축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맹자의 철학은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오늘의 책, 『제자백가 : 인간을 말하다』의 내용을 아주 간단히 소개해드렸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여전히 우리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과연 선한지 악한지를 따져 묻기 이전에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선악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죠. 안타깝게도 제자백가들은 선악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에 소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선악을 단지 사회가 규정한 규범적 선악으로 파악하는 데 그쳤으며, 사회적 선악의 틀에서만 인간을 파악하려 시도했죠. 예컨대 성선설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이미 사회 도덕에 부합하는 것이라 말하며, 성악설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사회 도덕에 반하므로 사회 도덕을 학습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둘 다 인간을 사회 도덕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파악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맹자와 설전을 벌였던 또 다른 사상가 고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자의 말 대로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란 법도 서쪽으로 흘러가란 법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방향 개념을 물의 속성인 마냥 착각할 뿐이죠. 인간의 본성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선과 불선을 초월한, 마치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은 존재이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 낸 선악 개념으로 인간을 규정해버릴 뿐이라는 이야기이죠.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선악이란 사회적 차원의 선악, 즉 우리 모두의 도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좋음과 나쁨’은 각 개인의 선악, 즉 ‘나’를 주체로 내세우는 ‘나’의 도덕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가 만들어 낸 가치체계를 우상처럼 맹신하고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도덕 속에서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죠. 아무쪼록 고자와 니체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사회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선악 판단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도덕을 스스로 창조하는 소용돌이치는 물처럼 살아 가시길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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