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읽는 논리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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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과 귀납에 대해 잘 알려진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연역이란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구체적인 사실을, 귀납은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사실을 도출한다고 설명되죠.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기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대단히 잘못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연역과 귀납의 올바른 정의를 소개해드린 후 왜 저러한 오해가 생겼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연역과 귀납을 구별하는 올바른 기준은 전제가 결론을 얼만큼 보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컨대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100%)으로 뒷받침한다면 연역 논증이고, 전제가 결론을 개연적으로 뒷받침하면 귀납 논증이라 하죠.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어진 논증에서 전제는 결론을 얼만큼 보장할까요? 간단히 분석해보면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명제가 참이고,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라는 명제도 참일 경우 결론은 항상 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뒷받침하는 논증을 연역 논증이라 하죠. 그렇다면 조금 다른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주어진 논증에서 전제는 결론을 얼만큼 보장할까요? 이 경우 우리는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에 이르는 여러 사람들의 죽음을 확인함으로써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을 제법 개연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을 뿐이지 필연적으로 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냉동 인간이라든가 혹은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는 불멸의 인간이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이처럼 전제가 결론을 높은 확률로 뒷받침하는 논증을 귀납 논증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귀납 논증은 반례가 뒤따를 수 있는 논증이기도 하죠.
따라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연역이란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보장하는 논증이며, 귀납이란 전제가 결론을 개연적으로 보장하는 논증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이제 두 논증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부수적인 전제들을 제거하여 논증을 단순화하면 두 논증의 추론 방식이 정반대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두 논증은 전제와 결론이 서로 뒤바뀐 모양을 이루고 있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제와 결론의 포함 관계입니다. 자명하게도 소크라테스라는 한 사람은 사람 집합에 포함되는 하나의 원소에 불과하죠. 따라서 연역 논증의 결론은 전제에 포함되는 명제이며 귀납 논증의 결론은 전제의 범위를 넘어서는 명제입니다. 따라서 연역 논증은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일 수밖에 없으며, 반면 귀납 논증은 전제가 참이라 해서 결론 또한 참일 거라는 보장이 없죠. 이러한 의미 차이는 연역과 귀납의 한자어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
연역의 한자 구성은 ‘풀 연’과 ‘풀 역’으로 즉 커다란 묶음을 낱개로 잘게 풀어내는 의미를 연상시킵니다. 반면 귀납의 한자 구성은 ‘돌아갈 귀’와 ‘거두어들일 납’으로 즉 잘게 풀어진 조각들을 거두어들여 본래의 커다란 묶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함축하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연역과 귀납에 대한 오해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논증을 보면 알 수 있듯, 연역 논증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라는 일반적인 전제로부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있으며, 반면 귀납 논증은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전제로부터 모든 사람의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있죠. 이러한 이유로 수많은 교과서에서는 연역이란 일반적 사실로부터 구체적인 결론을, 귀납이란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라고 잘못 설명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다음의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주어진 논증의 각 명제들을 살펴보면 전제1은 일반적이며, 결론은 구체적입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주어진 논증은 일반적 사실로부터 구체적 사실을 추론하는 연역 논증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주어진 논증은 귀납 논증입니다.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처럼 귀납 논증도 때로는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구체적인 사실을 추론할 수 있으며, 연역 또한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역과 귀납에 대한 전통적 정의는 다소 결함이 있는 정의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했듯 귀납 논증은 전제가 결론을 개연적으로 뒷받침하는 논증입니다. 따라서 귀납 논증은 전제가 참일 경우 결론 또한 참일 가능성이 크지만 100%는 아니라는 이야기이죠. 어쩌면 이러한 사실은 귀납 논증의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대표적인 예로 칠면조의 역설이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예시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컨대 칠면조를 기르는 한 사람이 1월 첫째 날 아침 9시에 칠면조에게 먹이를 줍니다. 주인은 그러한 행동을 12월 24일까지 거의 1년 동안 지속합니다. 이 경우 우리가 칠면조의 입장에서 추론을 해본다면 12월 25일에도 주인은 역시나 동일한 행위를 반복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겠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주인은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칠면조 요리를 먹기 위해 12월 25일 칠면조를 도살했습니다. 이로써 칠면조의 귀납적 추론은 비극적인 실패로 마무리된 거죠.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교훈은 귀납 논증의 경우 아무리 전제가 많더라도 결론을 필연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거엔 연역 논증이 우세했습니다. 고전 논리학에서는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필연적으로 사실인 것만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 연역 논증의 결론이 필연적일 수 있는 이유는 애초에 결론이 전제에 포함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결론이 ‘사람은 죽는다’라는 전제에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죠. 다시 말해 연역 논증은 우리가 전제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귀납 논증의 결론은 비록 거짓일지도 모르지만 대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죠. 따라서 연역과 귀납의 장단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상으로 연역과 귀납에 대해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자고로 논리학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논증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거죠.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좋은 논증이고 또 무엇이 나쁜 논증일까요? 다음 포스팅에서는 논증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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