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F.S.피츠제럴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기회다. 돈의 많고 적음은 가능 세계의 크기를 결정한다. 재산이 천 만원인 사람은 천 만원 만큼의 세계만 경험하고, 일 억인 사람은 일 억원 만큼의 세계를 경험한다. 가령 오늘 점심 식사비도 빠듯한 사람에게 크루즈 여행은 몇 억 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의 존재 만큼이나 의미 없을 것이다. 그러니 돈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가능 세계의 확장을 향한 욕망과 다름 아니다. 즉 돈은 가능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강력한 열망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목적과도 다름 아니니 말이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한 학력만능주의를 떠올려보라. 명문대를 졸업하는 이들은 사회적 성공을 거머쥘 가능성도 크다고 여겨지므로 사회적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은 명문대를 발판 삼아 더 나은 삶을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오직 명문대를 졸업해야만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다면 어떨까. 이제 명문대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진화하고 만다. 돈도 마찬가지다. 오직 돈 만이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돈은 더이상 욕망의 실현 수단이 아닌 욕망의 대상 그 자체가 된다. 즉 인간은 값진 것을 얻기 위해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하찮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로써 돈은 신이 되었다.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신이 되어버린 돈과, 이를 숭배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 개츠비는 <웨스트에그>라는 신흥 부촌 지역의 화려한 대저택에 사는 부자다. 그는 5년 전에 데이지라는 아주 ‘우아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짧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데이지는 당시(까지만 해도) 변변치 않았던 배경의 개츠비에게 결혼을 약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지 않아 둘은 자연히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지는 재력 가문의 톰과 결혼하게 된다. 반면 개츠비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벌기로 한다. 이를테면 불법으로 주류를 유통(당시 미국 사회엔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다)한다던가, 혹은 금융 사기 등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데이지와 헤어지고 5년이 지난 후 다시 나타난 개츠비는 5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한 거부가 되어 있었다. 이제 개츠비는 그 만한 재산이라면 데이지와 예전 행복했던 과거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어쩌면 개츠비의 계획은 예전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에그와 강 하나를 두고 마주한 웨스트에그에 집을 마련한 것이다. 매일 밤 개츠비는 강 건너 희미하게 보이는 데이지의 집을 바라보며 그녀와의 재회를 꿈꿨다. 그리고 얼마 뒤 개츠비의 소원은 이뤄지는 듯 했다. 데이지를 집에 초대하며 만남을 갖기 시작했고, 데이지 또한 이 은밀한 만남에 즐거이 응한 것이다. 둘은 톰 몰래 개츠비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며 다소간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개츠비는 고작 '밀회'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 원하는 건 데이지가 톰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개츠비 본인과 당당하게 새출발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개츠비는 셋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용기내어 톰에게 말한다. '데이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이제 데이지만 톰에게 이별을 고하면 둘의 관계는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데이지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황이 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치닫은 것 같다는 자괴감으로 인한 혼란이었을까. 그녀는 뛰쳐나가 차를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시후 그녀를 기다리는 건 더 커다란 비극의 씨앗이었다. 그녀가 사람을 차로 치어 죽인 것이다. 놀란 데이지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도망갔다. 이때 그녀는 마음 속으로 큰 결단을 내린다. 톰을 선택하기로. 집으로 돌아온 데이지는 남편 톰에게 개츠비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이후 개츠비는 차에 치여 죽은 이의 남편에게 살해 당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공허한 사랑의 허무한 종말이다.
표면적인 줄거리만 보면 그저 진부한 사랑 놀음 이상의 서사는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데이지의 이기적인 면모나, 혹은 개츠비의 불쌍한 최후 따위의 표층적 사건에 집중하는 이들에게 『위대한 개츠비』는 따분한 소설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우리가 이 소설을 보다 깊이 감상하기 위해선 그들 감정의 근원을 반드시 <돈>과 관련지어 이해해야만 한다.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나는 건 데이지다. 사실 그녀는 개츠비를 만나든 톰을 만나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둘 모두 무일푼이었다면 데이지는 떠났을 테니 말이다. 데이지에게 중요했던 건 누구와 만날 때 더 풍요한 <가능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점 뿐이다. 데이지가 살인자로 몰려 자신의 <세계> 자체가 아예 붕괴될 뻔 하자 재빨리 개츠비를 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녀의 사랑은 오직 물질적 기반이 지탱하고 있는 형식적 의례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런가 하면 톰은 어떤가. 그는 날 때부터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늘 거만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름다운 데이지에게 반해 결혼 생활을 시작하긴 했지만 불륜 관게를 이어가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톰이 데이지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가능성은 적다. 그렇다면 톰에게 데이지란 무엇일까. 데이지는 단지 톰의 자본력에 걸맞는 상품 그 자체였으리라. 즉 톰은 데이지에게 무한한 가능 세계를 약속하고, 반대로 데이지는 톰의 그러한 능력을 증명하는 상징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둘은 매우 탁월한 이해 관계를 뽐내는 환상의 짝꿍이 된 것이다.
이쯤되니 책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개츠비는 뭐가 <위대>하다는 걸까. 작품 속 배경은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이었던 미국이 경제적 호황기를 보내며 물질만능주의가 사회를 잠식하는 시기를 다룬다. 사람들은 쾌락을 원했고, 또한 쾌락을 가능케 하는 돈을 쫓았다. 물론 그 쾌락이란 위에서 계속 언급한 <가능 세계>를 뜻한다. 하지만 개츠비가 조금 달랐던 점이 있다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도 정작 그는 쾌락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원한 건 단지 과거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 뿐이었다. 즉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도 여전히 과거의 사랑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잃지 않고 간직했다는 것, 그것이 작중 모든 인물과 구별되는 개츠비 만의 위대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한 눈에 반했던 건 과연 참다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욕망했던 이유 역시 많은 남자들이 그를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톰이 데이지를 곁에 두려하는 것 만큼이나 개츠비 또한 데이지를 상징이자 훈장으로 여겼을 따름이다. 게다가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 역시 물질만증주의의 단면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탐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탐욕 :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대단히 새로운 통찰이 번뜩이는 정의는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게 있다면 탐욕이라는 감정이 욕망과 더불어 사랑과 다름아니라고 정의되었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러하다. 무언가를 강력히 탐욕하는 것은 사랑과도 같다. 탐욕의 대상과 결합되고자 하는 강력한 마음이 수반되니 말이다. 혹자는 욕심과 양심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더라. 욕심은 나만 좋을 대로 행하는 것이고, 양심은 남에게도 좋을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만 좋을 대로 행하는 사랑이 곧 탐욕은 아닐까. 데이지의 행동은 이러한 정의에 딱 드러 맞는다. 개츠비를 죽음으로 내몰고도 나몰라라 할 수 있었던 마음의 근원엔 저 좋을 대로만 행동하는 탐욕의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도 한 번 자문해보자. 연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정말 사랑일지, 탐욕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