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에 관한 촌평: ep2. 지옥
게임결과 456명의 참가자 중 201명이 살아남는다. 공포에 질린 참가자들은 단체로 게임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 중 변호사 출신의 상우(박해수 분)가 동의서를 거론한다. 게임 참가 동의서의 세번째 조항--'참가자의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에 따라 게임 중지를 요청하는 것이다. 게임 진행자는 상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곧 투표가 시작된다. 다만 투표를 시작하기 전 진행자는 묘수를 낸다. 상금을 공개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상금은 총 456억이다. 이는 참가자 수에 비례한 상금으로, 참가자가 총 456명이니 상금도 총 456억이 되는 것이다. 이윽고 시작된 투표 결과는 거액의 상금이 공개된 탓인지 자못 팽팽한 양상으로 흘러간다. 반대 대 찬성, 50대 50. 50대 51. 50대 52. 그때 누군가 소리친다. "미친 거 아니야? 다들, 이 짓을 계속하자는 거야 지금?" 한바탕 소란이 일고, 게임 속행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부딪힌다. 하지만 소요는 오래 가지 못한다. 진행팀 요원이 총구를 들이민 것이다. 진행자는 말한다. "지금부터 민주적인 투표 절차를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투표의 본질을 살펴보자. 진행자가 말하듯 투표는 '민주'주의 시민의 핵심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이다. 시민은 투표를 통해 그가 가진 권력의 일부를 양도한다. 즉 시민은 권력의 직접적 주체로 전면에 드러나기보다, 대의제 관료들의 뒤로 물러나 자신의 의사를 관료들에게 알리거나, 혹은 관료들을 평가하여 다음 투표 때 반영하는 식의 간접적 권력 주체로 변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투표는 곧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요컨대 투표를 통해 당선된 사람의 권력은 바로 그 투표로부터 증명된다. 설령 지도자의 한심한 실정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그의 권력은 투표로부터 정당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도자가 뱉은 저 대사-- "지금부터 민주적인 투표 절차를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는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내뱉은 한 문장엔 '민주주의'와 '폭력의 예고'가 동시에 담겨 있지 않던가. 그가 말하는 민주적 절차는 게임 진행팀 요원들의 폭력으로부터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막스 베버의 통찰이 의미심장하다.
근대국가는 공적 법인체의 성격을 띤 지배조직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 데 성공한 지배조직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근대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제아무리 원한 관계라 할지라도 개인의 사적인 복수는 금지되며, 그들 다툼에 관한 해석과 그에 따른 처벌은 오직 공적인 재판의 영역에서 다뤄지게 된다. 따라서 근대 국가의 시민은 단지 정치적 시민이기 이전에 폭력 행사권을 포기한 연약한 시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징어 게임 진행자가 내뱉은 저 역설적인 수사는 시민의 딜레마를 다소 과장되지만 넘치지 않게 표현한 탁월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소극적 권력을 부여 받되, 적극적 폭력을 상실한 시민의 존재론적 지위를 못 박는 것이다.
여하튼 참가자들은 투표를 통해 게임을 중단하는 데 성공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간다. 예리한 시청자라면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으로 돌아갈 것을 손쉽게 예측했으리라. 다만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그 배경이다. 무엇이 그들을 다시 게임으로 이끌었을까. 흥미롭게도 그들은 모두 크고 작은 <죽음>을 공유한다. 예컨대 기훈(이정재 분), 상우(박해수 분), 일남(오영수 분), 새벽(정호연 분), 덕수(허성태 분), 알리(아누팜 분) 등 그들 모두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죽음을 대면한다. 기훈은 당뇨에 걸린 어머니의 도래할 죽음을, 상우는 스스로 다가서려 시도했던 자발적 죽음을, 일남은 병에 걸린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새벽은 이북에서 넘어오지 못한 가족의 잠재적인 죽음을, 덕수는 자신을 배신한 부하를 찔러 헤치는 분노의 죽음을, 알리는 악덕 사장의 신체적 죽음을 목격한다. 그들은 모두 죽음의 곁에서, 혹은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목격하거나, 혹은 목격할 가능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 적극적 계기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고민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에리히 프롬은 죽음이 없이는 삶도 없다며, 따라서 죽음이라는 관념이 부재한 동물의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이렇듯 죽음은 삶의 의미를 따져물으며 다가오는, 생으로의 진정한 초대인 셈이다. 하지만 삶을 죽음으로, 죽음을 삶으로 여기는 거꾸로 된 인식 속에서 천국은 지옥으로, 지옥은 천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요컨대 그들 현실 세계의 삶이 시궁창에 처박혀 죽을 운명에 처했을 때, 마침내 그들이 피비린내 가득한 오징어 게임장으로 떠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미 그들의 삶은 죽음이 되었기에, 그들은 삶을 좇아 죽음의 현장으로 나선 것이다. 삶과 죽음의 이 기묘한 역전 속에서 그들의 지옥은 게임장이 아닌, 그들이 떠나온 현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