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에 관한 촌평: ep3. 우산을 쓴 남자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돌아온 사람의 수는 187명. 종전의 참가자 수가 201명이니 떠나간 대부분이 게임장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제 그들은 하나둘씩 <팀>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 거대하고 위험한 게임에 개인으로 맞서는 것은 무척이나 무모하다는 공감대가 그들을 무리짓게 한 것이다. 기훈(이정재 분)은 상우(박해수 분), 알리(아누팜 분), 일남(오영수 분) 등과 무리를 이룬다. 덕수(허성태 분)는 새벽(정호연 분)을 영입하려 시도하고, 미녀(박주령 분)는 덕수의 무리에 끼워달라며 마음에 없는 교태를 부린다. 바야흐로 집단주의가 개시된 것이다. 이는 곧 집단 간의 대립과 대치, 나아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예측케 하는 대목이다. 다만 여기서 나타나는 집단주의의 양상은 현대적 의미의 집단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가 아는 집단주의의 본질은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개인의 가치와 도덕, 정체성 등은 집단의 가치와 도덕, 정체성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집단화 속에서 개인의 최우선가치는 여전히 자기 생명의 보존이다. 요컨대 '나' > '나의 집단' > '너의 집단' 순으로 가치 체계의 서열이 정해진다. 이때 각 집단은 '나'의 것이냐 '너'의 것이냐에 따라 갈래지어진다는 점에서 집단주의적 특성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나'가 '집단'에 우선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 한계를 보인다. '나'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론 '나'의 중요를 강설하는 개체는 그 자체로 비판 받을 여지가 없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 아니던가. 다만 우리는 <'나'만 중요하다>와 <'나'는 중요하다>의 구분짓기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전자의 '나'는 그것을 발화하는 <특수적 '나>를 상정하지만, 후자의 '나'는 <세상의 모든 '나'>를 전제한다. 요컨대 전자가 이기적 개인주의라면, 후자는 보편적 개인주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짓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 각각이 집단주의와 관계맺는 방식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기적 개인주의자들의 집단은 각 부분--개인--의 합이 전체--집단--의 크기보다 작다. 수많은 '나'들의 이기적 행태가 다른 '나'들의 이기적 행태와 물리고 물려 서로를 훼손하는 공모자로 역기능하게 되는 탓이다. 물론 혹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생존'이라는 단일한 목표로 수렴한다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우리'의 생존이 아닌 '나'의 생존이며 따라서 이기적 개인주의 집단은 목표는 각자도생으로 발산하고 만다. 반면 보편적 개인주의 집단은 연대의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이는 굳이 네그리가 제안한 <다중>의 개념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모종의 휴머니티를 연상시킨다. '나'가 중요한 만큼 내 앞의 '나'도 중요하다는 인식의 전제, 혹은 그러한 가치의 공유를 통해 보편적 개인주의 집단은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독단도, 개인을 외면하는 집단의 무심함도 지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각 참가자들이 형성한 집단의 특성을 비교분석해보는 것은 <오징어 게임>을 시청하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두 번째 게임은 달고나 게임이다. 이는 진행팀이 제시한 <틀>에 맞추어 똑같은 <모양>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총살을 당하는 황당하도록 참혹한 게임이다. 다만 달고나 게임에 임하는 각 참가자들의 서로 다른 <출발점>이 흥미롭다. 새벽(정호연 분)은 전 날 밤 목숨 걸고 잠입한 끝에 게임의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를 정보를 얻고, 상우(박해수 분)는 정보를 통해 게임의 내용을 미리 유추하여 유리한 선택을 선취한다. 미녀(박주령 분)는 진행팀 몰래 빼돌린 라이터로 달고나를 녹이는 묘수를 내고, 또 병기(유성주 분)는 권력자와의 비밀스러운 결탁으로 두 번째 게임이 달고나 뽑기라는 고급 정보를 한 발 앞서 입수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련하고도 순진하게 맨몸으로 게임에 임한다. 흥미롭게도 달고나 게임은 필요와 요구에 따라 개인을 정형화하는 일련의 사회화 과정과 닮아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틀을 넘어서도 모자라서도 안 되는 사회적 자아는 이를 어길 경우 자연히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참가자들의 태도는 가지각색이다. 누군가는 이 사회에 숨은 어두운 진실--새벽이 들어간 환풍구는 왜 그리도 어두웠을까--을 밝히고자 목숨을 걸기도 하고, 더러는 우월한 지성으로 정보를 독점하려 하기도 하며, 더러는 편법--미녀의 라이터--으로, 더러는 불법--병기의 결탁--으로, 그리고 능력 없는 다수는 그 지식과 정보의 공백을 죽어라 몸으로 벌충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 혀를 할짝이는 절대 다수의 처절함이 권력자들의 신발을 핥는 뭇 영화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