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Sep 11. 2022

라이터를 꺼라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칠흑 같이 짙은 어둠이 온 세상에 내려앉은 무거운 밤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밤, 내 존재를 짓이기고 짓누르는 밤, 이 세상에 외로운 이는 오직 나 뿐인 듯한 밤. 그 밤 아래 당신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가 않은 공포심으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방법이 하나 있다. 라이터를 켜는 것. 당신은 주머니를 성실히 뒤져 싸구려 라이터 하나를 꺼내든다. 그리고 능숙한 엄지 손가락 놀림으로 라이터를 켠다. 칙칙. 화르르. 이제 저 시커먼 어둠은 적어도 당신 반경 일 미터 남짓한 거리 밖으로 썩 물러나고 만다. 그제서야 당신은 웃는다. 안도감의 한숨도 뒤따른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라. 라이터 안에 남은 기름은 당신의 밤을 견뎌주기엔 그리 충분치가 못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라이터는 빛을 잃는다. 이제 당신은 어쩔 셈인가. 아무도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 이 깊은 밤을 당신은 홀로 견뎌낼 수 있는가.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으며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밤 아래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짙은 어둠이 내 모든 존재의 빛을 빨아들이는 압도적인 좌절의 밤을 걸었다. 그리고 이내 도망을 꿈꿨다. 저 두꺼운 어둠의 층위 밖으로 내 존재를 대피시키고 싶었다. 손쉬운 방법은 임의의 빛에 의지하는 것이다. 마치 라이터 따위의 것처럼 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하나 같이 밤을 견뎌낼 수 없는 인물들이다. 마약에 도취되어 현실 감각을 마취하고 살아가거나, 구두쇠 심보로 현실을 내놓고 미래만 기약하여 살아가거나, 병으로 물든 현실의 삶을 외면한 채 현학적 세계만 동경하거나, 현실의 골칫거리를 잊기 위해 방탕한 쾌락을 좇거나 운운. 그들은 손가락으로 자기만의 라이터를 부단히 매만진다. 칙칙, 화르르. 어둠이 두렵다며 눈 앞의 조그마한 불빛만 쏘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고작 손바닥만한 라이터가 어찌 저 거대한 어둠을 상대하랴. 라이터는 도리어 저 어둠이 얼마나 암울한지만,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어둠의 음습함만 돋보이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둠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유감스럽게도 유일한 묘안은 칠흑의 밤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 뿐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함을 있는 힘껏 바라보는 것 뿐이다. 밤을 지나야만 검붉은 새벽놀을 볼 수 있음을, 그 긴긴 밤의 여로를 끝마쳐야만 아침에 닿을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 뿐이다. 유진 오닐의 희곡『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런 책이다. 우리 모두가 은폐한 저마다의 밤을 똑똑히 목격하길 권려하는 책, 그 긴 여로를 기꺼이 장려하는 책, 당신 주머니 속의 라이터를 용감하게 부숴버리길 권면하는 책.






작품 내에서 <밤>이 가지는 두 가지의 의미론적 층위는 사뭇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첫 번째 의미에서 밤은 그들의 암담한 현실 그 자체를 상징한다. 깜깜함이 지극하여 그 어떤 밝은 희망도 존재할 수 없음을 잔인하게 일러주는 진실의 밤. 작중 인물들은 그 어두운 밤이 서둘러 지나가길 희망하며 저마다의 라이터에 의지하곤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밤은 그들의 환한 낮, 다시 말해 그들의 처절한 현실적 공간--낮의 밝은 이미지는 그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기능한다--을 은폐하도록 기능한다. 이때 밤의 이미지는 작중 인물들의 도피를 돕는 요새다. 따라서 작중 인물들은 첫번째 의미에서 밤의 소멸을 갈구하는 반면 두번째 의미에서 밤의 도래를 소망하는 딜레마에 갇혀있다. 그들은 밤에 갇힌 채 밤으로부터의 <탈출>과 동시에 밤으로의 <참여>를 희망하는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제목『밤으로의 긴 여로』가 뜻하는 바 <긴 여로>는 끝나지 않는 영원한 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 모두는 밤의 깜깜함을 온전히 버텨내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밤을 충만히 견뎌내야만 아침이 온다는 사실을 힘껏 외면하는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밤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만 공연히 발휘함으로써 한껏 더 깊은 밤 속으로 깊숙이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이로써 그들의 심리적 코드는 <도피>로 요약된다. 몰핀에 기대어 몽롱한 세계로 도피하는 메리, 방탕한 환락가를 드나들며 쾌락의 세계로 몸을 뉘이는 제이미, 현학적 세계에 심취하여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에드먼드, 마땅히 돈을 써야할 눈 앞의 필요에 눈 감고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만을 살아가는 티론. 그들 모두는 시꺼먼 밤의 한 켠을 힘없이 빛내주는 조그마한 라이터만 강박적으로 매만질 뿐이다.





앞서 언급한 밤의 두 번째 의미는 작중 <안개>의 의미를 증폭시킨다. 유진 오닐의 말처럼 작중 인물들 모두는 <안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안개란 무엇인가. 현실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도록 막는 희뿌연 방해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작중 인물들에게 안개는 방해물이 아니다. 도리어 밤은 그들로부터 요청되고, 환대 받는다. 그들은 낮이 아닌 밤을 살아가길 원하는 자들이고, 선명한 현실에 눈을 감길 바라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안개란 따가운 현실을 은폐하는 베일이 되어준다. 메리의 속내를 들어볼까.


안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가려주고 세상을 우리로부터 가려주지.
그래서 안개가 끼면 모든 게 변한 것 같고
예전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거나 손을 대지 못하지.


여기서 우리는 메리를 특별히 비난해선 안 된다. 메리는 작중 인물 모두를 대변했을 뿐이다. 티런은 상업 배우가 되기로 타협했던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곤 예술 배우로 인정 받던 한때를 회상한다. 제이미는 동생 에드먼드를 질투하고 그를 방탕함으로 인도했던 과거를, 그리고 어린 동생에게 홍역을 옮겨 죽게 한 과거를 자책하며 더 음침한 방탕함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에드먼드는 병에 걸린 눈 앞의 현실보다 거대한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젊은날을 추억하는 데 여념없다. 이처럼 그들 모두는 반쯤 눈을 감고 현실을 살아간다. 반은 과거에, 반은 현실에 눈을 걸치고 살아간다. 그들은 눈앞의 잔인한 현실을 선명하게 바라보기보다 안개의 위로를 받는 데 익숙한 것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들에게 창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웅장한 뱃고동 소리는 병든 고래의 신음처럼 아프게 들린다. 현실을 깨닫게 할 만큼 정신이 깨어나는 소리이기에, 눈을 부릅뜨라는 현실의 거센 명령 같은 소리이기에.






다만 한편으로 작중 인물들의 도피는 전혀 반대의 속성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그들 모두가 수행하는 과거로의 도피 행위는 아픈 현실을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원동력 따위의 것이라는 해석이다. 혹은 과거로의 일시적 도피를 통해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고 소통할 기회를 확보하고, 뼈아픈 현실을 재인식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는 물론 제법 타당성이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아다시피 『밤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의 가정사를 빼다 박은 자전적인 작품이고, 그의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작품>이며, 마침내 유진 오닐로 하여금 작중 인물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청산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이 아니던가. 즉 유진 오닐은 과거라는 소통의 공간을 통해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밤으로의 긴 여로』에 등장하는 네 인물의 인격분석, 이은정, 2003, 한국드라마학회

『과거로의 도피와 영혼의 재탄생: <밤으로의 긴 여로>』, 이은경, 2004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