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혹은 나의 모든 단점도 포용해줄 환상의 단짝을 찾아 헤매본 적은 없는가. 혹 있다면, 그러한 당신의 환상을 지탄하려는 건 아니다. 또한 그 환상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불가능한 소망이라고 초를 치려는 것도 아니다. 뭐, 언젠가는 그러한 사람이 돌연 당신 앞에 나타나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운명 같은 사람과 만나서 일순간 사랑에 빠지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과 남은 여생을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은 그저 당연히 따라올 결과라고만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선 재를 뿌릴 용의가 있다. 내가 아닌 한 정신분석학자가 말이다. 사랑에 대한 명저, 오늘의 책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독일에서 쭉 자라며 박사학위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받는다. 하지만 히틀러 치하의 나치당이 집권한 후 1933년 에리히 프롬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시민으로서 정신분석 연구를 이어간다. 이후로 그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 및 종합하여 오늘날 사회심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표저서로는 <사랑의 기술>을 비롯하여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의 마음> 등이 있으며, 특히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에게 사회적 명성을 가져다 준 저서이기도 하다.
이 중 오늘 살펴볼 책은 <사랑의 기술>이다. 1956년 발표된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뭇여자들과 크고 작은 상처를 겪은 후 최종적으로 정착한 그의 반려자, 프리먼과 만난 후 집필되었다. 이 책을 통해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에 대하여 심리학적이고도 정신분석학적인 분석을 가한 최초의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책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프롬의 주장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빈축을 샀다. 한창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와중에 사랑이 감정이 아닌 노력이라니, 별로 달가운 주장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롬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싶은 사람들은 많아 보인다. 일례로 몇 년 전 한국에서 꽤나 인기를 끌었던 한 노래 가사를 볼까.
에리히 프롬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가사의 노래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는 점을 볼 때, 오늘날 <사랑의 기술>이 서점의 인기 코너에 꽂혀 있는 모습은 퍽 의아한 풍경이기도 하다.
아무튼 프롬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책의 목차를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먼저 1장에서는 왜 사람들이 사랑을 특별한 노력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그에 대한 반박으로 사랑엔 노력과 기술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다음으로 2장에서는 사랑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와, 사랑의 본질과 메커니즘에 대해서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규명한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오늘날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이 어떠한 모습으로 붕괴되어 있는지를 간단히 소개하며, 끝으로 4장에서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통해 사랑이라는 기술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며 논의를 마무리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책의 전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소개하기 보다는 이 책을 통해 꼭 기억해둬야 할 에리히 프롬의 굵직한 사상을 나름의 스토리로 엮어 준비했다.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시작하자.
맨 먼저, 프롬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오해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 오해의 내용은 사람들이 사랑을 아무런 노력 없이 누구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랑을 누구에게나 불쑥 생기는 감정으로 여기지, 결코 훈련이나 기술이 필요한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롬은 사람들의 이 같은 오해의 배경으로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문제 보다는 ‘받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서, 본인이 타인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한 노력에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더 많이 사랑 받기 위해 사회적인 성공을 꿈꾸거나, 외모를 치장하는 등 자신의 매력을 높이는 방법들에만 몰두해 있고, 그렇다보니 서점에 꽂혀 있는 각종 연애지침서의 강령들도 이성에게 매력 있어 보이는 방법만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사람들은 본인이 겪고 있는 사랑 문제를 능력이 아닌 대상의 문제라고 가정한다. 무슨말인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가 그저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본인에게 사랑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알지 못하고, 단지 바람직하지 못한 대상을 만났다고만 생각한다는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최상의 대상을 찾아나서도록 강제할 뿐 그들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생각할 기회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셋째,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최초의 순간만이 사랑이라 여기며, 그 이후 사랑에 머무르는 지속적 상태는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한다. 즉 누군가와 만나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는 최초의 상태만이 오직 사랑의 뜨거운 증거라고 여기고, 그러한 열정이 식어 적대감, 권태감 등이 늘어난다면 그들의 마음은 식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프롬에 따르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사랑의 증거로 여기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오히려 프롬은 감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고작 서로가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방증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 사랑의 기술의 유명한 구절을 한 번 살펴보자.
이 구절을 통해 프롬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노력 없이 사랑에 임하는가' 이다. 즉 우리는 사랑 말고 다른 분야에서는 열심히 준비한 활동이나 프로젝트가 실패할 때 그 문제점을 찾아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해 얼마든지 노력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에리히 프롬은 좋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선 고도의 훈련과 노력과 집중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금 역설하는 있다.
그렇다면 프롬이 생각했던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프롬에게 사랑이란 인간의 실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이러한 프롬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기 자신을 아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즉 인간은 이 세상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다만 무슨 말인지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감정 이입을 해보자. 10년을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 혹은 수십번 고백하고도 짝사랑으로부터 거절당한 한 사람, 혹은 당장 오늘 잘 거처도 없는 한겨울의 부랑아, 이들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다시피 이 세상은 이들이 얼마 만큼 공부했는지, 또 얼마 만큼 상대를 사랑하는지, 또 얼마만큼 추위에 벌벌 떠는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즉 이 커다란 세상의 작동 방식 속에서 개인의 불행은 털끝만큼의 가치도 없는 셈이다. 관심은 커녕 나와 세상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단절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무력하고, 고독하다는 인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기 쉽다. 프롬은 이러한 인간의 존재 상태를 가리켜 인간의 실존적 상태라고 설명하며, 나아가 인간의 모든 불안은 이 같은 분리감에서 온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같은 분리감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들은 어떠한 행동들을 할까.
첫째는 도취적인 해결 방식이다. 가령 원시 민족들이 단체로 광희 상태에 빠져 성적 황홀경에 이르는 의식들이나 혹은 그밖에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적 도취 등이 여기 포함된다. 즉 이들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을 벗어나고자 일시적으로나마 도취 상태에 빠짐으로써 무언가와 결합되었다는 안정감을 찾곤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집단과의 합일이다. 즉 나 자신을 집단과 동일하게끔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속한 집단 내에서 혼자만 별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타인과 내가 가진 차이성을 제거함으로써 점차 집단과 자신을 동일하게 바꿔나간다는 특징이 있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얼마전 경찰대 학생이 직원 경찰을 폭행한 사건을 떠올려도 좋다. 이 학생은 직원 경찰들을 폭행하며 몇 년 뒤면 나한테 무릎 꿇을 것들이라는 말을 남겼다. 즉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경찰대학생이라는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내면의 불안감을 해소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셋째는 창조다. 본래 창조란 세상에 존재하는 특정 재료를 이용해서 자신이 의도한 무언가를 새로이 만드는 과정이다. 다시말해서 창조자는 나무를 이용해 책상을 만들던, 보석을 이용해 목걸이를 만들던 뭐가 됐건 간에 외부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무언가를 계획하여 만들고, 그 작업물을 바라보는 입장에 서는 경험은 마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기뻐했던 것과 같은 지위에 서는 경험을 선사한다. 즉 세상과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험을 누리게 됨으로써 분리감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 세 가지 방법들을 모두 부정했다. 그가 보기에 이 방법들은 모두 일시적이거나, 혹은 가짜 합일에 지나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프롬이 실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안한 유일한 해답은 다름아닌 인간과의 합일, 즉 사랑이었다. 프롬의 저서 사랑의 기술은 바로 이러한 주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프롬이 사유했던 사랑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프롬은 공서적 합일과 성숙한 사랑을 구분한다. 여기서 공서적 합일이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함께 살아가는 합일의 상태를 뜻하는데, 쉽게 말해 공서적 합일로 묶인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이 훼손된 채 서로에게 의존하는 일치 상태에 머무르는 이들이다. 프롬은 이러한 공서적 합일의 예로서 수동적인 공서적 합일과 능동적인 공서적 합일을 설명한다. 먼저 수동적인 공서적 합일이란 임상적 용어로는 피학대 음란증, 즉 마조히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다른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분리감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능동적인 공서적 합일의 형태는 가학성 음란증, 즉 사디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상처를 입히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에게 복종 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또한 분리감을 해결하기 위한 잘못된 방법이다. 물론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 감각으로는 마조히즘이나 사디즘 같은 것들이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아주 극단적인 도착증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이와 같은 공서적 합일의 증세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할 공산이 크다. 가령 여자친구가 입지 말아야 할 옷을 강제한다던가, 혹은 중요한 선택을 남자친구에게 맡기던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프롬은 이러한 공서적 합일을 경계하며 우리 모두가 성숙한 사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프롬이 말한 성숙한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을 뜻한다. 쉽게 말해 두 사람이 각자 자기다움을 유지한 채 만남을 이어가는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다는 프롬의 말을 개인주의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명백한 오해다. 프롬이 의도한 메시지는 서로에게 종속되거나 의존하지 말고 각자의 특성을 유지한 채 결합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사랑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랑이 일종의 활동이라는 능동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납득시키고자 프롬은 스피노자의 이론을 인용한다. 프롬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감정이라는 것을 크게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으로 구분했으며, 이들은 각각 행동과 격정을 뜻한다.
행동하는 이들은 자신이 뜻하는 목적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므로 스스로가 그 행동의 주인인 반면, 격정에 따르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휘몰아치는 감정에 쫓기는 자들로서 행동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프롬은 이야기한다. 가령 길거리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마주치고는 쫓아가 번호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격정에 쫓겨 감정의 종 노릇을 하는 거라고 프롬은 지적한다.
나아가 프롬은 사랑이 빠지는 것, 혹은 받는 것(수동적)이 아니라 주는 것(능동적)이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준다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 혹은 희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눠준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이렇게만 말해선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이 대목은 내가 설명하기 보다는 프롬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다음은 프롬의 전언이다.
조금은 철학적인 이야기라 직관적으론 이해가 잘 안 갈 것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가령 내가 연인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거나, 혹은 격려의 메시지를 건넬 때 상대는 큰 힘을 얻곤 하지 않나. 이처럼 우리는 꼭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을 주지 않고서도 충분히 상태에 무언가를 '줄'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는 상대방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의 생동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 프롬의 메시지가 대략 이런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행위는 상대방도 주는 행위에 동참하게 만든다. 즉 당신으로부터 따뜻한 눈빛을 건네 받은 상대방은 다시금 힘을 얻고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속삭일 수 있는 법이다. 이로써 프롬은 주는 것은 상대방도 주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성숙한 사랑에 필요한 자질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프롬이 제시한 요소들은 크게 네 가지다. 보호와 책임, 존경, 그리고 지식. 이들 각각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보호란 말 그대로 상대방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뜻한다. 프롬은 이를 꽃을 기르는 한 여인에 빗대어 설명한다. 만약 어떤 여자가 꽃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정작 물을 주지 않아 꽃을 죽게 만든다면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 할 수 없지 않은가. 즉 사랑에는 그 대상에 대한 강력한 보호의 정신이 깃들어야만 한다고 프롬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책임이란 상대방의 문제를 나의 문제처럼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 다만 이러한 책임은 결코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이라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프롬은 설명한다. 이어서 존경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또한 상대방의 독특한 개성을 인정할 줄 아는 태도를 가리킨다. 만약 이러한 태도가 결여된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성장과 발달을 진심으로 응원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끝으로 지식이란 말 그대로 상대방에 대한 지식을 뜻하는데, 중요한 건 이 지식이 상대방의 주변에 머무르는 파편적 지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라고 프롬은 이야기한다. 가령 여자친구의 찡그린 표정만을 보고 화가 났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해보자. 이때 남자친구는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지식은 그저 파편적이고 주변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만약 여자친구의 핵심으로 파고든다면 여자친구가 화난 모습이 보다 본질적인 이유의 단순한 표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여자친구의 모습 너머로 화가 난 표면적 자아가 아닌 괴로워하며 신음하고 있는 근원적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프롬은 성숙한 사랑이 이 같은 네 가지 자질을 갖춰야한다고 이야기했으며 네 가지 자질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며 서로의 발달을 돕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프롬은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랑의 형태가 모두 동일하다고 봤을까. 다시말해 친구간에 나누는 사랑이건, 연인간에 나누는 사랑이건, 가족간에 나누는 사랑이건 모두 다 성숙한 사랑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동일하게 취급했을까. 그렇지 않다. 프롬은 책에서 사랑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나눠서 분석했다.
각각을 간단하게만 살펴보자.
맨 먼저 형제애는 모든 사랑의 밑바탕에 놓인 가장 기본적인 사랑을 뜻한다. 즉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어떠한 배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형제애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다음으로 부모의 사랑은 모성애와 부성애로 양분되는데, 이 중 모성애란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며 특히 보호의 원리를 나타낸다. 반면 부성애란 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며, 사회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아이는 이러한 부성애를 통해 아버지로부터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고 또한 그 결과 상벌을 받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사족을 달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성애를 통해 어머니와 애착 관계를 맺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 부성애를 통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상에 해당하는 아기의 단계를 벗어나서 남에게 모성애와 부성애를 가질 수 있는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서 모성애와 부성애가 균형있게 종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프롬은 만약 이러한 균형이 깨졌을 때 우리는 사랑에 있어 수없이 실패할 것이라고 부연한다. 실제로 프롬은 책의 3장에서 이같은 모성애와 부성애가 깨짐으로 인해 사랑이 붕괴하는 모습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서 자기애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뜻하지만 결코 이기심과 혼동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배타의 원리를 따르는 반면, 자기애는 만인을 위한 사랑을 가리키며, 자기 자신이 그 만인에 포함될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프롬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하며 자기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성애란 이성과의 결합에서 나타나는 사랑을 뜻하는데, 이는 다른 사랑과는 달리 배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꺼번에 여러 애인을 사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혹자들은 연인간의 사랑이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을 전제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른 여자는 어떻게 되든 관심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라는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프롬은 이러한 두 사람의 태도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으며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와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즉 올바른 성애란 비록 한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면 배타적으로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론 형제애의 바탕 위에 놓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배타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성애 역시 마찬가지로 만인에 대한 사랑 위에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에 대한 사랑을 살펴보자. 사실 이는 조금 복잡한 이야기라 한 번 쓱 읽어보고 이해가 잘 안 간다면 그냥 넘어가도 무방하다. 아무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인류의 역사 초기에 인간이 모시던 신은 모계적인 신이었다. 이 시기에 인간은 어머니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어린 아이처럼 그저 무력하게 어머니 신의 무조건적이고 한량 없는 사랑만을 기대했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인류는 부계적 신을 모시게 된다. 부계적 신은 조건이 따르는 신이며 행동에 따라 상벌이 주어지는 신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인간은 질서를 따르고 규율에 복종하는 등 아버지 신의 지도 원리에 순응한다는 행동 패턴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흘러 현대에 이르러서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큰 폭으로 변화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신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서만 지칭될 뿐, 외부적인 힘을 지니지 않고 인간들 스스로가 그 내부에 신의 원리를 확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외부의 신을 믿기 보다는 스스로가 삶의 질서와 규칙을 정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프롬은 다시금 우리 내면에 깃든 모성애와 부성애의 균형을 주장한다. 즉 인류가 모계적 신과 부계적 신을 거쳐 마침내 스스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리를 확립했듯이, 사랑에 있어서도 모성애와 부성애의 균형을 고루 갖추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붕괴될 것이라고 프롬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사랑의 이론에 대한 프롬의 견해를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그렇다면 프롬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성숙한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을까. 먼저 그는 우리가 사랑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전에 다음의 네 가지 전제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각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우리는 건강한 사랑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하며, 둘째,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에만 몰두하는 연습과 더불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 이러한 훈련의 과정이 더딜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임해야 하며, 넷째, 사랑의 성장에 대해 최고의 관심을 갖고 스스로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해야 한다. 프롬은 우리가 이와 같은 네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춤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로 우리는 무엇을 실천하고, 또 무엇을 훈련해야 할까. 프롬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를 주문한다. 하나는 자아도취의 극복이고, 또 하나는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먼저 자아도취부터 살펴보자. 프롬은 자아도취라는 것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태도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쉽게 말해 상대방의 언행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태도와 다름아니다. 따라서 자아도취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상대방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아주 표상적으로만 소통할 뿐이다. 즉 프롬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자아도취를 극복하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가 회복할 것은 신앙이다. 여기서 신앙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차원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믿음 내지는 신뢰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즉 상대방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짐으로써 서로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기술에서 논의된 프롬의 이론들을 대략적으로 훑어보았다. 사실 포스팅 길이를 최대한 줄여보고자 무리하게 생략한 부분이 무척 많음에도 불구하고 참 많은 개념들이 등장해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들을 달달 외울 필요는 당연히 없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할 최소한의 한 가지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던 끝에 성숙한 사랑에 대한 프롬의 정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꽤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자기 자신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의 합일'이라고 했다. 간혹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연인들이 서로를 달콤하게 부르는 애칭으로 자기야 라는 말을 주고 받곤 한다. 여기서 자기 라는 말은 본래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게 자기라고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의 저변에는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강력합 결합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프롬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서적 합일, 즉 상대방의 개성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일치 욕구이진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자기야' 라는 말보다 더 달콤한 애칭은, 어쩌면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는 '당신', 당신이라는 대명사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대로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좌절감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단하고 무력하게 느껴질 지라도, 반드시 그 길 위에만 사랑의 열매는 꽃을 피운다. 아쉽게도 사랑은 누구나가 꿈꾸듯 여유롭게 노니는 마음으로 향유할 수 있는 따위의 놀이가 아니기에. 그러니 사랑이라는 관념을 더이상 낙원 같은 곳과 엮지 말자. 낙원는 도리어 이별한 이들의 방종이 더 잘 어울릴 테니.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