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법의 대화>, 윤권순
때로 과학은 가히 혁명적이다. 상상해보라. 위성을 쏘아올려 우주의 광활함을 처음 목격한 이의 두려움을. 혹은 현미경으로 초미시 세계를 최초로 발견한 이의 전율을. 과학은 우리 일상의 친숙함을 단숨에 파괴하며 낯선 세계를 드러내는 혁명성을 가진다. 이러한 혁명성은 기존의 시선을 폐기하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조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그렇다면 과학적 발견 이전의 세계에서 이후로의 변화는 도약일까, 전환일까. 이에 대한 과학사의 해묵은 철학적 논의가 있으니 '과학사가 과연 연속적인가, 비연속적인가'에 대한 설전이 바로 그것이다. 연속적인 과학사란 한 시대의 과학적 명제가 인간의 비판적 이성에 의해 거듭 수정되어 가는 과정 속에 보다 발전된 다음 시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과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완전해지며, 현대 과학은 난공불락의 위상을 갖는다. 이에 반해 비연속적 과학사를 주장하는 이들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과학의 발전을 뜻하지 않으며, 과학적 혁명은 '패러다임의 전환'만을 가져다 줄 뿐 과학의 발전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갖지 못함을 외친다. 이같은 맥락에서 현대 과학은 최고 진리로서의 존엄성을 잃는다.
과학적 배경이 얕은 나로서는 선뜻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치우칠 수 없었다. 다만 연속적 과학사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최신 과학은 과연 역사상 최고 진리의 지위를 갖춘 과학일까? 중학교 때 접한 고대 과학사를 떠올려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따르면, 만물은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조합의 원리에 따라 이런 저런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를 테면, 사과는 흙 속에 묻힌 채 물을 먹고 자란다. 즉 사과는 흙과 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과를 공중에 던질 때 땅에 떨어지는 이유는 물과 흙이 가라앉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4원소설은 사물의 원리, 나아가 만물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방금 사과의 설명을 듣고 이에 논리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있는가? 현대 과학의 시선에서 4원소설은 발 디딜 틈 조차 없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던지는 바다. 현대 과학의 최신 이론은 진리일까. 추위와 감기의 인과관계 조차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현대 과학이 거대하고 복잡한 우주의 원리를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그럴싸하게 설명한다는 이유로 진리에 가깝다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인간이 추종하는 작금의 현대 과학 이론도 먼 미래 후손들에겐 4원소설에 버금가는 재미난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이쯤에서 퍽 감상적인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에 사는 것도, 먼 미래 후손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며 그저 지금, 여기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고, 미래고 어쨌건 내 앞의 현재를 살며, 지금 내게 보이는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진심 자체가 과학의 본질은 아닐까. 설령 후손들의 비웃음거리가 된다 할지라도, 내가 발붙인 세상의 진리를 쫓고싶은 처절하면서도 어쩌면 애절해보이는 진심 말이다.
과학사에 법이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탓에 책의 제목이 의아하게 다가왔다. 책의 서문을 통해 그 미묘한 연결점의 실마리를 곧 알 수 있었다. 본래 과학과 법은 모두 인간 이성의 산물이며,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전했다. 근대 과학이 발전하게 된 계기도 법과 과학의 상호작용 가운데 이성의 해방과, 아울러 제한이 가능했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누누이 말해온 과학의 혁명성은 우리 사회에 비단 긍정적인 결과만을 주진 않았다. 때로 인간 이성의 수용력을 한참 넘어서며 이 땅을 잔혹하게 파괴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으로 수많은 인류를 겁주었다. 그렇다면 법은 어떤가. 태생적으로 법은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제창하며 등장했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법을 이행 할 동의를 얻고자 다소간의 폭력성을 등에 업은 채 말이다. 이이제이랄까.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전략마냥, 인간의 예측을 비웃는 과학의 폭력을 잡고자 법의 폭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니. 과학도, 법도 인간 이성의 산물임을 생각해 볼 때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애초에 과학과 법은 좀 더 풍요로운 삶을 향한 인간 이성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과학과 법에서 인간성을 엿볼 수 있을까. 수많은 기아 난민들의 기근을 해결하는 유전자 조작 기술보다도 상류층 사회의 다이어트 약품 개발에 연구비가 몰리는 실정이고, 몇 십 년 동안 살아오던 집을 억울하게 빼앗기는 이를 구원해줄 법의 정의는 죽어 있는게 현실이다. 바라건대, 다시금 인류를 사랑하는 정신이 과학과 법을 비추길 소망한다. 인간을 위하는 마음이 과학에 묻어날 때, 또한 인간을 사랑하는 정신이 법에 담길 때 왜곡된 이 땅의 원형이 그 모습을 되찾지 않을까. 과학과 법의 원만한 대화는 인간 이성의 적절한 중재가 있을 때 가능하다. 훼손된 본질의 회복이야말로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치유임을 믿는다. 현대 사회에 도사리는 과학의 위험성을 해결해 줄 법의 필요성 혹은 실효성을 논의하기 이전에 과학-인간, 법-인간의 참 된 관계를 바른 인간 이성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선행되는 것이 어떨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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