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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28. 2020

선악판단능력을 상실한 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K5nsItkP45w





얼마전 온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하나 폭로되었습니다. 이른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알려진 집단 성착취 사건입니다. 가해자들은 피해 여성들의 약점을 쥐고 붙들며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등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는데요. 저는 그들의 엽기적인 행각에 충격을 받는 한편 그들의 도덕적 자아가 자못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그들은 스스로의 범행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걸까요. 지금 온국민이 그들에게 공분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대다수 국민들이 선악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가해자들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걸까요? 왜 사람들은 저마다 선악 판단 능력에 차이를 보이는 걸까요? 이처럼 선악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악마들이 득세하는 난세에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오늘의 책,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기원후 121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는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어린 시절을 보내죠. 다행히도 유복한 집안 배경 덕분에 유능한 가정교사들로부터 부족함 없이 공부하며 자랐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그가 심취한 건 바로 스토아 철학입니다.  잠시 후에 소개해드릴 <명상록>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스토아 철학의 입장이라 생각하시고 읽으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성장한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의 양자가 되었고,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쳐 161년 마흔살의 나이로 로마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이름하여 오늘날 로마 5현제라 불리는 왕들 중 가장 마지막 순서로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른 시절 로마는 끝없는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창궐하는 전염병과 홍수, 대기근부터 시작하여 이웃한 나라들의 계속되는 침략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팎으로 수많은 재난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혼란스러운 시대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가 훌륭한 왕으로 추앙 받는 이유는 다름아닌 그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를 곧잘 수식하는 ‘철학하는 황제’라는 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그는 철학적 사색을 통해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왕이었기 때문이죠. 또한 본인이 깨달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이른바 실천적 지성인이었다는 점에서 후대의 큰 존경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사람이라 큰 오점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아들, 즉 로마 역사 최악의 황제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능력 위주의 세습을 거스르고 사사로운 마음을 쫓은 결정이라는 점에서 그의 사상에도 크게 어긋나는 오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말년의 아우렐리우스는 끝까지 전쟁터에서 직접 지휘를 하다 끝내 본인도 전염병에 걸리게 되었고 기원후 180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명상록>은 사실 출판용으로 쓰인 책은 아닙니다. 원제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아우렐리우스 본인의 사색을 담은 일기이자 자기 자신에게 전하는 당부의 말들 뿐이었죠.


그는 삶과 죽음이 수없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이 일기를 써 내려갔고, 따라서 우리는 <명상록>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 나아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사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기라는 게 원래 그러하듯 <명상록> 역시 치밀한 논리를 따라 체계적으로 쓰여진 글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날 그날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옮겨 놓은 글이죠.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무런 가이드 없이 무작정 <명상록>을 읽는다면 아마도 아우렐리우스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쉽게 찾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본 포스팅은 여러분의 보다 용이한 이해를 위해 <명상록>의 내용을 크게 우주론과 실천론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우주론이란 아우렐리우스의 세계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에게 이 세상의 원리란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해드릴 예정이고요. 이어서 수양론은 앞서 말한 세계관 속에서 우리들 각자가 지향해야 할 목표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전해드릴 계획입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세상 모든 만물에 작용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말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그리하여 그 어느 것도 비껴갈 수 없는 무조건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러한 절대적 질서를 서양 철학에서는 로고스라고 부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간혹 이 로고스를 신, 섭리, 우주의 이성, 절대 정신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생성과 소멸부터 홍수나 대가뭄 등의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우주적 질서인 로고스에 따라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이러한 맥락에서 <명상록>의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처럼 아우렐리우스는 로고스가 만물의 근원이자 법칙이며, 간혹 우리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로고스에 따라 발생하는 필연적인 것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로고스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로 필연성이란 세상 모든 일이 신의 섭리 대로 흘러간다는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 삶은 마치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다는 거죠. 실타래를 푸는 과정에서 갑자기 실의 굵기나 길이 등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도 모든 것이 로고스에 따라 정해진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과 다름 아니라는 겁니다. 참고로 철학에서는 이를 유물론적 일원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유물론이란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사랑도 호르몬 물질의 작용일 뿐이라는 입장이죠. 또한 일원론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전체를 설명하려는 입장을 나타내는 겁니다. 즉 아우렐리우스는 세상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물질들은 모두 로고스라는 하나의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 무한성이란 우주의 순환적인 시간관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서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의 모양처럼 이 우주도 마찬가지로 로고스라는 법칙 안에서 무한하게 순환한다고 봤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소 슬프게도 이러한 무한성은 개별 구성원의 입장에선 덧없음의 정서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시간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찰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바다를 적실 수 없듯, 인간의 명예가 아무리 높다 한들 무한한 우주 안에선 티끌 보다 못하다는 것이죠.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이 대체로 명예나 권력을 허망한 것으로 여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아우렐리우스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찰나의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당부한 것입니다.




이어서 로고스의 특징 세번째는 다양성입니다. 이것은 결코 로고스가 다양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으로서의 로고스는 하나이지만, 개별적 구성원들이 로고스로부터 건네 받은 역할과 기능은 저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신다면 연극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연극에서 각 배우들은 연출자의 지도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열심히 소화해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로고스가 우리에게 부여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아우렐리우스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원활한 이해를 위해 지금까지 다룬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세상을 이끄는 절대적 법칙인 로고스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은 로고스에 따라 발생하는 필연적인 사건들이며,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삶은 덧없는 것이고, 개별적 구성원들은 로고스로부터 부여 받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우렐리우스의 세계관입니다. 조금 이해가 되셨나요.


하지만 아직 아우렐리우스의 이 같은 세계관이 딱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으실 겁니다. 도대체 우주가 나랑 무슨 상관이며, 또 그의 말 대로 삶이 덧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충실히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의 수양론을 마저 살펴봄으로써 아우렐리우스의 세계관이 실생활에 어떻게 접목되는지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수양론을 한 줄로 압축하면 로고스를 따르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즉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자는 거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가 파악한 인간의 구조를 도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이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밖에는 마음,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육체라고 여겼죠.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이성이 다름아닌 로고스입니다. 즉 우주의 절대적인 질서이자 법칙이자 세상의 원리인 로고스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아우렐리우스는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우주의 로고스는 우주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우주의 일부에 해당하는 개체들에겐 부분적인 해가 있을지 몰라도 우주 전체는 늘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말해 로고스는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인데요, 아우렐리우스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모두는 정의가 선이고, 거짓이 악이라는 걸 자연스레 알고 있죠. 따라서 그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로고스가 존재하며, 우리 모두는 자신의 로고스를 쫓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니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세상에 하나의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질서인 로고스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또한 인간은 우주의 구성원이므로 로고스를 따르며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곧 이성으로서 이미 우리 내면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성이 선하다고 판단하는 행동만 함으로써 로고스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감이 오시나요.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우리 안에 정말 로고스가 있다면, 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말 대로 우리의 이성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왜 우리는 때때로 악을 저지르고, 급기야 누군가는 악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곤 하는 걸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아까 살펴본 도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의 내면에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로고스적 이성이 존재한다고 믿었죠. 여기서 선악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선은 우주 전체에 이로운 것이어야 하고요, 악은 우주 전체에 해로운 것입니다. 즉 개인에게만 이로운 것은 결코 선이라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왜 우리는 로고스에 반하여 악을 저지르고, 또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은 왜 사람마다 다른 걸까요. 그 원인은 바로 육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우렐리우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욕망을 원합니다. 이를테면 명예욕이나 권력욕, 재물욕 등을 강력하게 욕망하는 것이 바로 육체라는 이야기죠. 즉 육체의 욕망이 우리를 로고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마음의 역할은 뭘까요.




이는 프로이드 식으로 따지면 에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쉽게 말해 인간의 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쉽게말해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 이성 사이에서 끝없는 줄다리기를 하며 욕망과 선을 왔다갔다 한다는 거죠. 이 마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주 향하는 쪽으로 쉽게 물든다는 점입니다. 가령 내면의 로고스를 따르고자 고요히 집중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느새 로고스로 물들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로고스의 음성을 훨씬 잘 들을 수 있는 것이고요, 반대로 육체의 욕망에 습관적으로 굴복하는 사람은 결국엔 그 마음도 욕망으로 물들어 나중엔 로고스의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는 단계, 혹은 로고스가 어두워지는 단계, 즉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아예 상실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철학에서는 육체의 욕망에 물든 마음 상태를 파토스라고 부릅니다. 이는 우리 말로 보통 정념이라고 번역되는데요.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 중 하나인 아파테이아는 바로 이 파토스와 없다를 뜻하는 접두사 a의 합성어로서, 정념이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스토아 철학이 금욕주의로 알려진 배경이 여기 있죠.




아무튼 결론은 간단합니다. 로고스가 지배하는 우주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따름으로써 비로소 육체의 욕망, 혹은 파토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그러한 노력이 쌓이고 쌓인다면 끝내 우리는 욕망이나 정념에 결코 휘둘리지 않는 로고스 그 자체, 즉 내가 곧 우주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상록의 핵심적인 철학이자 스토아 철학의 최종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명상록>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내면의 이성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가 곧 로고스가 되는, 즉 자신의 내면에 우주를 건설한다는 그의 사상이 마치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인간을 소우주로 간주한 불교 전통과도 흡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지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면의 로고스가 밝아지길 원한다면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우리를 잠식하려 드는 육체의 욕망과 맞서 필사의 전쟁을 벌여야만 합니다. 우리 안의 로고스가 조금이라도 꺼려하는 행동은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죠. 이는 동양 철학으로 비유하면 양심의 찔림과 같은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에 찔림이 있는 것을 멀리 하는 태도, 우리의 로고스가 악하다고 판단한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아파테이아와 다름아니죠. 그렇다면 이제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로고스로 물들일지, 파토스로 물들일지, 그리하여 여러분 안에 우주적 질서를 회복할지, 욕망의 화신이 될지 말이죠.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온통 욕망으로 흠뻑 물드는 날엔, 선악을 판단하는 로고스의 음성이 아예 들리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아직 양심의 찔림을 느껴진다면 불행 중 다행입니다. 마음 속의 비상경보기가 아직은 꺼지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러므로 고요히 눈을 감고 미약하게 울리는 로고스를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쫓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안에 가득 울리는 로고스의 선명한 음성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우리의 내면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쪼록 파토스를 쫓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린 시대에서 이 짧은 글이 오래도록 잠든 로고스를 깨우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한 번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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