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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22. 2020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초등학교 시절 '바른생활 익힘책' 수업 시간에 처음 들은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으레 초등학생의 이해력이라는 게 별로 대단치가 않듯 그 시절의 나는 위 구호의 진의를 상당히 잘못 이해했다. 그저 '한국 물건이 짱이구나'로 이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배울 만큼 배운 성인이라면 저 구호의 일반적인 의미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세계의 주류적 코드를 쫓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우리 만의 특색과 정서를 고집하여 만들어 낸 상품이 도리어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해석 정도면 충분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러한 해석이 단순히 표면적 의미만을 포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 구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다 참된 가치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 그 자체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잠시, 어린 시절의 내가 저 구호를 오해한 원인을 되살펴보면 그것은 아마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내멋대로 바꿔버림으로써 빚어진 것, 즉 오해가 아닌 오독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을 '가장 세계적인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다'로 해석한 셈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포착한 저 구호의 표면적인 의미는 나의 오독과 크게 다를까? 그들도 결국 나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만이 최우선가치라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번 생각해보자. 세계 어느 지역의 문화든 저 구호 속 '가장 한국적인 것'의 자리를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 않겠느가. 가장 이집트적인 것, 가장 중국적인 것처럼 말이다. 가령 피라미드라던가 만리장성 같은 것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세계적인 문화 유산들은 가장 지역적이라는 특징 하나만으로도 세계적이라는 명성을 거뜬히 쌓아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모든 개성에 대한 존중이자, 모든 발생에 대한 긍정이며, 모든 생성에 대한 찬양과 다름 아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늘날 이와 같은 독해는 시대적 오독이다. 문법적 오독이 아닌, 해석학적 오독이 아닌, 국가적 오독이다. 오로지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만이 민주 시민의 덕목이며, 이에 반하는 행동은 설령 그것이 인류 전체를 위한 선일지라도 국가적으론 악으로 규정되니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철학이 필요한 시대다. 범람하는 미디어와 이미지들의 표면적 의미가 우리에게 건네는 사실을 의심없이 진리로 여기다가는, 다시말해 어떠한 회의주의의 가능성도 이땅에 살아남지 못한다면, 우린 어느새 코드의 수용자(=진리의 입장에선 피해자)를 넘어 코드의 생산자(=진리를 몰아내는 공모자)가 될테니 말이다.


부디 우리모두 캐치프레이즈의 표면적 의미(=기표) 밑으로 우아하게 '미끄러질' 수 있기를.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한 번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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