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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18. 2020

돈과 명예를 가져도 공허한 이유

플라톤, <향연>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jo3fn1npZv8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연인과의 달콤한 입맞춤? 혹은 부모님의 따뜻한 포옹? 그렇지 않다면 이별의 쓰라린 고통이 떠오르시나요. 그 밖에 다른 어떤 것들을 떠올리셨다 할지라도 아마 이 모든 것들은 한 가지 공통점으로 수렴할 겁니다. 대상이 정해져있으며 감정이나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죠. 즉 그동안 우리에게 사랑의 정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교감 정도로 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려 2천년 전에 등장한 한 괴짜는 사랑에 대한 매우 파격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는 사랑이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도무지 아름다운 것들에만 경도된 사회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예찬한 명저가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의 책, 플라톤의 <향연>입니다.






향연의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입니다. 그는 기원전 427년에 태어나 기원전 347년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되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죠. 또한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생전 단 한 권의 책도 집필하지 않은 것과 달리 방대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는데요. 이 저서들의 큰 특징은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되었다는 것과 그 대화의 주인공이 스승 소크라테스였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건 순전히 플라톤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플라톤이 자신의 책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킨 이유는 뭘까요.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첫째, 소크라테스를 향한 플라톤의 신실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요, 둘째, 당시 소크라테스가 가진 지적 권위를 통해 플라톤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함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향연>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죠. 또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플라톤 본인의 생각을 전한 것이므로, 이번 포스팅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플라톤의 사상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아무튼 <향연>의 원제는 Symposium이며, 이는 함께를 뜻하는 그리스어 Sym과 마시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posium이 합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함께 마시는 자리가 곧 심포지움이자 향연이며, 그들이 술을 마시며 사랑에 대해 나눈 대화가 바로 <향연>의 내용인 것입니다.





내용의 전개는 대강 이렇습니다. 아가톤이라는 비극 시인이 어느날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한 기념으로 작은 잔치를 베풉니다. 이때 아가톤은 잔치에 온 손님들에게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미해보자고 제안하게 되죠. 이리하여 파이드로스부터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총 여섯 명이 에로스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내놓게 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각자가 사유하는 사랑의 다양한 속성이 드러나게 되죠. 이것이 <향연>의 커다란 흐름입니다.



따라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들 각자가 사유한 사랑의 속성을 순서대로 간단히 정리해보며 최종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사유했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에 큰 방점을 두고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여섯명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전에 한 가지 배경지식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입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동성애가 용인되었던 사회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남자 간의 동성애만 용인되었던 사회죠. 여기서 여성이 배제된 이유는 당시 그리스에 만연했던 남존여비 사상 때문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여자는 결함을 타고났다”고 말했을 정도였죠.) 즉 남성만이 고결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또한 남성 간의 사랑만이 훌륭한 것이라는 분위기가 은근하게 장려됐던 겁니다.




하지만 동성애에서 두 남자의 관계는 사실 대칭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자에 해당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사회적 안정기에 들어선 나이든 남성으로서 보통 연인이라 칭하고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랑받는 사람은 아직 소년기에 속하는 어린 아이로서 편의상 연동이라 칭합니다. 연인은 마음에 드는 연동을 선택한 후 연동의 성장과 발전을 후원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때로는 성적인 만족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동은 연인의 도움으로 사회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또한 시간이 흘러 연동도 어른이 되는 순간 이제 둘의 관계는 종료되며, 그들은 각자 새로운 연동을 찾아 연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쉽게 상상이 안 가는 이야기죠.




사실 여기에는 모종의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있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잦았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당시 남성들은 외딴 전투지에서 수 개월을 보내야 할 일이 많았고, 따라서 남성 간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사기 진작을 꾀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많은 소년들이 지혜로운 연인으로부터 지도를 받는다면 보다 강성한 국가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교육적 목표도 숨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상이 <향연>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이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향연>의 본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미한 첫번째 빌표자는 파이드로스입니다. 그에 따르면 에로스는 가장 큰 은혜를 베푸는 신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은혜란 연인은 연동을 갖고, 연동은 연인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 이유는 연인-연동의 관계로 맺어진 두 사람은 서로가 보기에 수치스러운 행동은 피하고, 훌륭한 행동만을 하도록 자극 받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그들이 전쟁터에 함께 나간다면 그들은 서로가 보는 앞에서 결코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고 싸움에 임하겠죠. 즉 파이드로스의 주장은 국가 구성원들이 모두 연인-연동의 관계라면 국가는 보다 강력해질 것이고, 연인-연동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건 에로스이므로 에로스가 가장 큰 은혜를 베푸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파이드로스가 사랑을 상대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상대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 늘 좋은 결과만을 초래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에 한 행동이 때로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일도 많습니다. 따라서 두번째로 나선 발표자 파우사니아스는 바로 이 점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그는 종전에 파이드로스가 논의한 에로스 논리에 선악의 가치를 끌고 옵니다. 다시말해 파우사니아스는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에로스가 아니라 선한 결과를 초래하는 에로스만 따로 구분하여 에로스를 찬미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악한 에로스란 상대의 몸만 사랑하고 정신적 성장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대로 선한 에로스란 상대의 정신적 성장을 이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정의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가리키죠. 이러한 마음 상태를 필리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이는 상대방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무튼 파우사니아스에게 사랑이란 상대방의 정신적 성장과 발전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세번째로 나선 에뤽시마코스는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건강과 병의 관점에서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에 따르면 의술이란 대립되는 것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를들어 몸이 너무 차가울 때 그와 대립되는 따뜻함을 통해 다시 건강을 되찾고, 또 몸이 너무 건조하다면 그와 대립되는 습함을 통해 우리 몸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는 이러한 조화가 다름아닌 에로스 덕분에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에뤽시마코스는 이러한 조화가 비단 의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술과 사랑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합니다. 에로스를 통해서 말이죠. 즉 그에게 사랑이란 조화와 균형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들의 사랑을 바라본다면, 사랑이란 서로를 통해 각자의 단점이나 모난 구석들을 보충하고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다음 차례를 이어 받은 사람은 구름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입니다. 그는 이야기꾼 답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건네며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는데요. 그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동그란 몸통에 팔 다리가 네 개 씩 있는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신에게 덤비자 제우스가 이들을 반으로 댕강 잘랐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후 인간들은 잘려나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고, 그것이 곧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사랑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사랑이란 존재론적인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탈출구였던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완성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죠.





이어서 다섯번째 차례는 비극작가이자 이번 잔치를 베푼 주인공 아가톤이 이어 받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에로스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존재이며,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덕의 근원은 바로 에로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신들이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에로스 덕분이라는 거죠. 이는 우리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의 기원이 사랑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아가톤은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예찬하며 앞선 네 사람보다 훨씬 강력하게 에로스를 찬미하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이윽고 아가톤의 이야기가 끝나자 드디어 마지막 차례인 소크라테스가 나섭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전에 먼저 아가톤의 의견을 반박하며 시작하는데요. 좀전에 아가톤은 에로스(사랑)가 모든 미덕을 지닌 최고 존재라고 했었죠. 이를 반박하는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만약 아가톤의 말대로 에로스가 모든 미덕을 지닌 존재라면 추함 보다는 아름다움을, 나쁜 것 보다는 좋은 것을 추구하겠죠. 그런데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실은 그것을 갖지 못했다는 결핍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에로스가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쫓는다면, 그것은 곧 에로스에게 아름다움과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에로스가 모든 미덕을 지녔다는 전제가 모순된 결론을 도출한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본인은 에로스를 무엇이라 여겼을까요. 이에 대해 그는 한 신화를 들려줍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에로스는 방편의 신 포로스와 가난의 신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로인해 에로스는 때로는 방편을 통해 지혜와 부를 얻기도 했고요, 때로는 가난 때문에 결핍을 앓기도 했던 거죠. 다시말해 에로스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중간 상태에서 언제나 결핍을 가진 채 좋은 것을 쫓는자라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한 가지 논리를 더 추가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할 때는 그것을 일시적으로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거죠. 따라서 좋은 것을 욕망한다는 말은 그것을 영원토록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라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에로스란 좋은 것을 영원토록 소유하고 싶은 욕망인 것이죠. 여기서 좋은 것이란 명예나 돈, 권력, 사랑 등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마 이를 이해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돈이나 권력을 영원토록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사랑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영원하길 꿈꾸기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소크라테스는 다름아닌 출산을 언급합니다. 인간은 사랑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과 닮은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명예나 돈, 권력, 사랑 등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충족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같은 욕망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그것은 불가능한 소망이겠죠. 출산한 아이는 언젠간 사라지고 말 유한한 존재이며, 명예나 돈, 권력도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소멸되어버리고 말 것들입니다. 따라서 에로스가 단지 좋은 것들에 대한 소유욕에 지나지 않는다면 에로스는 그저 덧없는 것에 대한 집착과 다름 아닐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결론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따라서 에로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발전시킵니다.



'좋은 것'과 '좋음'은 무엇이 다른걸까요.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 여러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 몇 개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어디에 거주한다던가, 나이는 몇 살이라던가, 혹은 무슨 어디에 근무한다던가, 그밖에 성격, 좌우명, 성별 등을 말이죠.


이같은 정보들은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을 조금씩 포함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다시말해 이러한 정보 조각들로 여러분의 본질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죠.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들이 어떠한 존재이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분에게서 이 같은 속성들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것들과 아무런 상관없이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좋은 것과 좋음 자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좋은 것이란 바로 명예나 권력, 혹은 육체적인 사랑 등을 가리키죠. 이것들은 좋음 자체로부터 좋음이라는 속성을 나눠 받은 덕분에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상사에 근무한다는 속성이 한 인간의 영원한 속성이 아니듯, 명예나 권력 등도 결코 영원히 좋은 것으로 남을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좋은 것 만을 쫓아 살아간다면 이는 우리의 삶을 잠시간 행복하게 해 줄 방편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언제나 공허하게 하는 결핍이 되어 우릴 괴롭힐지도 모릅니다. 에로스가 포로스와 페니아의 자식인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최종 결론은 이렇습니다.



즉 우리의 감각을 원초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좋은 것'들에만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좋음'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이는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명쾌하게 좋음이라는 것을 설명해낸다면 아마도 그것은 좋음 자체가 아니라 좋은 것들 중 일부에 속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옛 노자가 '도라 말해질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다행히도 소크라테스는 '좋음' 자체에 다가설 수 있는 한 가지 팁을 전수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출산입니다. 그가 말한 정신적인 출산이란 쉽게말해 세상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 담론을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 각자가 좋음 자체를 향해 달려가는 진리의 여정에서 정신적인 탐구와 사색을 통해 차츰 깨닫게 된 담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플라토닉 사랑이라는 말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적인 사랑, 즉 좋은 것에 대한 욕망 보다는 보다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좋음 그 자체를 추구하는 협력적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상이 플라톤의 향연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재차 말씀드렸듯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닌 좋음 자체를 추구하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좋음 자체를 향한 협력은커녕 다같이 한 마음이 되어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모양이 아닌가요. 비단 유튜브 시장만 봐도 그렇습니다. 온갖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영상으로만 뒤범벅된 유튜브 생태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담론도 찾아볼 수 없죠. 물론 이러한 분위기는 대중과 크리에이터의 상호 작용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일궈낸 사회적 불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동조하여 가담한 크리에이터들 역시 그들 자신이 크리에이터로서 추구해야 할 좋음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 보다는 당장에 그들의 행복을 돕는 방편, 이를테면 돈이나 인지도 등을 훨씬 좋은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을까요. 바야흐로 좋은 것만 욕망하고 마는 에로스의 화신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그러한 방편들만 가지고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법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 대로 정말 에로스가 방편과 가난의 자식이라면, 하염없이 방편을 쫓은 뒤에 뒤따르는 건 공허한 결핍 뿐일 테니 말이죠. 그러니 더 늦기전에 부자가 되는 방법, 성공하는 방법 등 온갖 방편만 범람하는 이른바 방편의 시대에서 좋은 것 너머의 좋음을 사색할 사유 능력이 회복되길 소망합니다.


덧붙여 감각적 쾌락만이 지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시대에서 감히 이 짧은 글 한 편이 작은 담론이 되길 바라며 오늘의 포스팅을 마칩니다.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적에 유튜브도 한 번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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