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Apr 30. 2020

'지식인의 소통', 역설의 역설?




가게 바로 맞은편에 흐르는 홍제천을 따라 몇 걸음 거닐다 찍은 사진 한 장. 제아무리 세게 흔들릴 지언정 부러질리 없는 저들의 원천은 단연코 유연함이리라. 그렇다면 내겐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길 담대한 유연함이 있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시하는 여러 가치 중 매번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소통'이다. 국민과의 소통, 학생과의 소통, 부부 사이의 소통 등등. 모두가 하나 같이 소통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외친다. 마치 소통이 무엇인지 모두들 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한 번 답해보자. 소통이란 무엇일까. 타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존중해주는 것? 물론 맞다. 소통은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적 실천일 뿐이며, 다소 야박하게 말하자면 소통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고로 올바른 현상이 되도록 오래 지속되기 위해선 내실부터 잘 다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난 소통을 위한 '내적 준비'의 가치를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다시말해, '식사'라는 것의 정의를 묻는 이에게 '음식을 씹어 삼켜 목구멍 속으로 넘기는 것'이라 어설프게 답하는 현상적 관찰을 넘어 보다 본질적 동기를 살펴보잔 말이다,


소통의 한자어는 '트일 소'와 '통할 통'이다. 화장실 하수구가 꽉 막혀 잔뜩 고인 물에 발을 첨벙여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수구 너머로 물이 통하기 위해선 수챗구멍을 '터야' 한다는 사실을. 소통이란 그런 것이다, '터서' 통하게 하는 것(그러고보니 '소통'이란 말을 우리나라에서 한창 유행하게 만든 대통령이 정작 꽉 막힌 하수구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무지 타인의 이야기가 흘러갈 곳 없이 꽉 막힌 사람, 스스로가 너무 옳은 나머지 그 어떤 이의 의견도 통할 구멍 없는 딱딱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토론 의지를 쉽사리 꺾을 만큼 열정적인 불통의 대가들. 그들의 말로는 대개 둘 중 하나다. 끝내 상대로 하여금 포기하고 도망치게 만들거나, 혹은 더 강한 '불통'들에게 부러지거나.


물론 우리 자신을 '튼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 아닌가. 일찍이 프로타고라스도 이야기했듯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아니, '우리 자신은 만물의 척도'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기준 삼아 타인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감히 '나'라는 기준을 꺾으려는 바람이 들이닥치니 어찌 어설픈 갈대처럼 흔들리랴. 그런 자존심이 우릴 쉬이 뻗대게 만든다. 건방진 에고적 자아가 요동을 치는 거다.


문득 문득, 아주 간헐적으로 노력해보기도 한다. 실은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려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쉽진 않다. 내가 틀릴지도 모른단 생각을 꺼내들자 마자 고개를 쳐드는 뿌리 깊은 방어기제와 온갖 합리화의 근거들이 나의 주장을 떠받친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에 대한, 정치에 대한, 결혼에 대한, 종교에 대한 나의 수많은 주장들을 말이다. 독단과 유연함 사이의 균형이 이토록 힘겨울까.


책을 읽고, 하루하루 지식들이 쌓여나갈 수록 어쩌면 나 자신의 구멍이 꽉 막히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다. '지식인의 소통'이란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은 수사인걸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작가의 이전글 2.연역논증 2)명제논리 ④선언명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