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권수 Jan 26. 2016

주의의 습관이 만드는 서로 다른 삶

성취와 행복의 증거는 자기 주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몰입(flow)을 연구하면서 일상에서 지나치며 살았던 주의(attention)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숨 쉬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 주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의 주의를 한 곳에 몰입하면 긍정적 정서가 유발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할 때 즐거움, 만족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행복에 주의력이라는 자원이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의식적 질서’가 선사하는 선물인 셈이다.    

  

몰입(flow)의 대가인 칙센트미하이(Csikszentmihalyi) 교수는 몰입박탈이란 실험을 했다. 의도적으로 주의를 몰입할 수 없도록 하고 주의의 분산을 조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일과 중에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집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못하게 하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온전히 끝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일주일을 지나면서 신체적 이상뿐만 아니라 정신적 이상 증세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긴 시간의 주의 집중이 아니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살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 실험이었다. 우리에게 주의는 한정된 것이다. 이런 한정된 주의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삶의 안전과 행복에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우리 앞에 밀려들어 오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 중요한 정보를 선택한다는 의미다. 목표로 하는 곳에 주의를 집중시킨다는 말은 목표 이외의 자극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월리암 제임스(William James)가 말했듯이 주의는 어떤 것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어떤 것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의는 선택하는 것이고,  같은 말로 버린다는 의미다. 우리의 뇌는 일정한 순간에 처리할 수 있는 처리용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곳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선택적으로 인식한다.  한계가 있는 뇌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인식한다. 사람들이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정보를 보더라도 자신과 관련 있는 것만 선택적으로 인식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뭔가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자극 속에서 주의가 할당된 자극 즉, 선택된 자극만 수용한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학습을 할 때 주의를 집중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기초가 되고 중요해지는 것을 당연한 사실이다. (PS. 일상에서 자신만의 의도와 목표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주의를 두지 못하는 것은 기억도 되지 않는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보고 있어도 우리의 주의가 할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억이 없으면 당연히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습과 기억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과 발전이 모두 한정된 주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한정된 주의로 최대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서인지 실제 우리의 뇌는 전두엽과 두정엽  회로에서 관심 있는 정보를 가려내고 덜 중요한 것을 지워버리기까지 한다. 이제는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유명해진 고릴라 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무대에 흰옷을 입은 여자 3명과 검은 옷을 입은 여자 3명이 서로 공을 패스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은 여자들이 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를 세어 보라고 한다. 사람들이 공을 패스하는 것을 세는 동안 사람들 사이로 고릴라가 지나가고 뒤의 커튼 색깔이 바뀌고 심지어 공을 패스하던 검은 옷을 입은 여자 한 명이 빠져 나간다. 하지만 흰옷을 입장은 여자들이 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를 세던 사람들은 눈 앞에 이런 관경을 정확히 보고도 고릴라가 지나가고, 커턴의 색이 바뀌고, 검은 옷을 입은 여자 한 명이 빠져 나가는 것을 보지 인식하지 못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의 주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공을 패스하는 곳에 할당되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다. 주의가 가지 못하거나 주의가 유지되지 못하면 보고도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과 경험이 바로 이런 주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고릴라 실험] https://www.youtube.com/watch?v=0dTUQrdinSY

  

주의는 관리되지 않으면 반응적이고 습관적이다. 관리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더 큰 자극으로 주의가 쏠리고 기존의 방식대로 주의가 흐르고 방황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육처럼 주의력의 근력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외부의 더 큰 자극으로 주의가 쏠려서 다시 목표한 곳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수업을 듣거나 책을 읽다가 휴대폰의 자극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지 못한다. 이런 주의의 흐름이 습관적이게 되면 자신의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고 그 집중을 유지한다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바쁜데 마무리되는 일이 없거나 수행한 일의 효율성도 떨어지게 된다. 목표로 한 곳에 주의를 집중하고 유지하는 주의력의 근력은 빈번한 집중을 통해 길러진다. 우리의 집중에는 능동적 집중과 수동적 집중 2가지가 있다. 능동적 집중는 자신의 목표와 의도에 따라 주의를 할당하는 집중을 말하고 수동적 주의는 자극에 의해 반응적으로 집중하는 것으로 게임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지향적인 능동적 집중이다. 이 능동적 집중이 우리가 주의를 관리하고 조절하는 근력을 키우는 것이다.      


주의가 가는 곳에는 에너지가 흐른다. 그리고 그곳에 사건과 경험이 존재한다. 그러니 반복된 주의의 결과가 오늘의 자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의 주의가 반복된 결과인 셈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가 주의를 어디에 많이 수혈했느냐에 따라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반복된 주의의 습관이 곧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게 된다. 자기 주의(attention)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주변의 영향력에 주의가 분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주의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과 힘도 없어진다. 자신이 스스로의 주의를 선택하고 조절한다는 것은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내적인 동기가 높아지고 더욱 활력 있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의를 조절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정된 주의를 분산키지 않고 자신의 주의(attention)에 주인이 되는 것은 원하는 삶과 행복을 위해서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일이다. 


 ps.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서 다음으로 넘기려 합니다. 그리고 주의력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가장 좋은 훈련은 명상인 것 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