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 멈춘다.
학교 수업에서 인간관계를 이야기할 때 꼭 내는 퀴즈가 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방금 올라왔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고 한 아이는 깨끗하다. 여기서 어느 쪽 아이가 얼굴을 닦을까? 당연히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가 닦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답은 깨끗한 아이가 얼굴을 닦는다. 인간은 인간관계 그 자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타인을 거울삼아 자신을 개념화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타인을 공감한다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고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 나가는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하나 있다. 타인을 바라보는데 주력하다가 진작 진짜 자신을 바라보기 힘들다. 그래서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당연히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익숙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런 탓에 자신에 대한 갈증을 늘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인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불안 속에 허우적대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해결하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하고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공감의 시작은 자기 자신임에도 늘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만 강조하며 자신을 억누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늘 들어도 위안이 되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 있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자기공감의 위력을 이렇게 확실하게 설명한 문구도 있을까? 고통스러운 감정과 마음에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정체된 감정의 에너지가 출구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감정은 해소되지 못하면 항상 몸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언젠가는 화산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자신을 알아 달라는 아우성 아닐까? 그 의미를 알아달라는 것이고 그 의미를 알게 되면 정체된 감정은 출구를 찾아 나오고 정확한 행동을 만들 수 있는 기대감이 생길 것이다. 자신과의 공감과 소통은 모호하고 억눌렸던 자신에 대한 사랑인 셈이다.
자기공감이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되는 이유는
고통스러움을 해결할 해답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공감이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되는 이유는 고통스러움을 해결할 해답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을 위해서 움직일 대상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공감을 통해 그런 힘을 확신하는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20대에 조금은 고통스럽게 고민하며 살았다고 진실이며 진리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어처구니없이 오만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인도상공의 비행기에서 산산히 부서지는 경험이 있었다. 많은 자료 조사를 통해 떠난 인도의 첫 외국여행이었다. 인도에 도착할 무렴 현재의 시각과 날씨를 알리는 기장의 방송이 나오고 시계를 보는 순간이었다. 아직 시계의 바늘은 한국시간을 알리고 있었고 시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기장이 알려주는 시간과 시계바늘의 시간적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2가지의 절망과 환희가 오갔다. 하나는 7년동안 현실을 도외시하며 고민하고 찾으려 했던 모든 진실이 한국에서 국한된 진실일 뿐이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런 절망은 너무도 뼈아픈 것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환희는 이제 진짜를 알아갈 수 있겠다는 카타르시스였다. 자신을 합리화하며 덮어 두었던 진짜 본 순간 명확한 항로를 느끼며 기쁨을 느낀 것이다. 그 후 인도의 생각은 가장 자유로운 날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7년의 고생을 위로 받는 듯 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오는 자기소통은 언제나 치유와 명확한 방향, 그리고 행동을 리드하는 후련함이 함께 하는 듯하다. 밖으로 향한 눈길과 질문을 자기 안으로 끌어 들일 때 고통스런 감정들 너머에 있는 자신을 보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진실을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탄생시키는 것 같다. 채널을 나에게 돌려 나의 모든 경험에 있는 그대로 공감하는 시간, 생각의 시간에 잡혀 살지 않고, 누군가 지시한 고통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치유의 시간을 만들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