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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수 Jul 04. 2016

우리는 왜 군중의 삶을 사는가?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는 삶, 자신의 가치가 없을 때 다른 가치를 쫒는다.

 많은 대학생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이다. 앞으로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먹고살 걱정같이 보이지만 삶 전체의 스펙트럼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 가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속내를 알면 쉬운 문제도 아니고 쉽게 나올 답도 아니다. 이때는 무엇을 해도 확신이 없다. 확신이 없으면 우리 뇌는 행동하기를 꺼려한다. 뇌는 확신하는 정보를 더 확실하게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조각된 타인과 군중의 가치와 의미


수업시간에 내사(introjection)를 이야기하면 충격을 받는 학생들이 많다. 자신이 추구하고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 정말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이나 사회,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잠시 충격을 받는 눈치들이다. 내사(introjection)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욕구나 필요, 판단이 아니라 타인의 의해 강요되고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타인의 가치가 나의 것으로 투영되어 진짜 내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관심이나 이해보다는 외부의 규칙, 규범, 가치를 무비판적이고 강압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할 때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내사된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나 가치를 모르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한다.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에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고 휘둘릴 수밖에 없다. 외부의 흔들림에 강한 불안과 두려움을 자주 느끼게 된다. 


스스로 결정하는 자가 아니라 충실히 따르는 자


어릴 때부터 부모, 학교, 학원,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틀에 박힌 사회적 요구를 우선적으로 수용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무리 없이 안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닐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내사된 사람에게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자아관여(ego-involvement)다. 자아관여란 자신의 존재가치를 특정 결과와 결부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에 자아관여된 사람의 가치는 성적이 잘 나왔을 때만 인정받는다. 이렇듯 내사된 사람은 자기 인생의 편집권을 자신이 가지지 못하고 세상 주류의 가치에 던져주게 되는 것이다. 열심히 자아관여된 가치를 쫒아서 살다보면 진정한 자신의 호기심, 도전, 즐거움, 가치를 알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이 쫒아야 하는 가치와 달성해야 할 목표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결정하는 자가 아니라 충실히 따르는 자가 된다. 우리는 사회와 주변과 부조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스스로 내사되고 자아관여 되어 살기 쉽다. 마치 환경에 잘 적응해 가며 진화하고 발전하는 자신을 느끼며 말이다. 한 번은 자신을 떨어져 바라보거나 물어 본다면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로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대학생들에게 있어(대학생은 상징적 의미일 뿐이다) 그동안 인식해 왔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자아일 수 있다는 충격은 절망감과 동시에 진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을 준다.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가 아니라 이제 자신만의 가치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순간 학생들의 얼굴은 확신에 차고 활력있고 밝아진다. 그 이유는 외부가 아무리 흔들려도 꿋꿋하게 나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진정한 자기의 발견’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기결정감 '은 이렇게 활력과 긍정적 정서와 연결되어 있다. 행복감의 밑천인 셈이다. 


행복한 사람은  선택을 위한 기준이 있고 선택권을 가진 사람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수용하고 확장해 나갈 때 사람은 성장한다. 그 성장의 흔적(Sign)을 먹고 성장할 때 자신의 존재감은 소외되지 않고 더욱 뚜렷하게 그려지게 된다. 자기이해가 되지 않을 때 자신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여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타인이나 군중의 삶을 살며 불안하고 방어적이게 되어 자기개방(self-disclose)이 힘들게 된다. 남의 다리를 긁는다고 시원할 리가 없듯 세상을 수용하지 못하면 성장은 고사하고 재미가 없다. 자기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타인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고 휩쓸리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자신을 왜곡시키거나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숨기고 타인의 요구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성장의 기회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 맞춰서 살아도 그것이 자신의 선택일 때 활력과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다. 본능이 아니라 동기의 존재다.      


회복력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자기이해가 바탕이 된다. 


 자신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세상의 풍파와 같은 위산에도 녹아내리지 않는 항체에 보호망을 씌우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회복력(resilience)이다. 세상의 많은 어려움이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아니라 깊은 맛을 내는 육수가 되기 위해서 역경에 대한 회복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회복력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자기이해가 바탕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반응이나 변화에 불안하거나 방어적이지 않고 자신을 내 놓는 개방을 통해 세상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회복력을 위해서 우리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물어야 한다. 쳐다보지 않고 묻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답은 묻고 물으면 나오게 되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의미와 가치를 느끼는 것에 질문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켜서 하는 일이라도 나만의 의미가 가치부여가 필요하다. 그래야 동기와 활력, 에너지가 커진다. 결과에 대해서도 수용하는 주체적 힘이 생긴다. 자기이해는 ‘선택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이나 군중이 요구하는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권을 주장하면서 키워지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감이라면 선택권 또한 나이에 상관없이 놓지 말아야 하는 만족과 행복의 보루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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