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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수 Oct 04. 2017

당신의 운명은 당신의 인지스타일

열심히 하고도 결국 나를 공격하는 인지 스타일들이 있다. 

당신이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반복된 인지스타일의 결과들이다. 사람이 어떻게 지각하느냐는 그의 인식을 좌우하고 그의 생각과 행동과 연결되면서 하나로 묶여진다. 물론 전략적으로 인식과 행동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지속하지는 못한다. 곧 부조화를 견디지 못해서 일치시켜려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문제를 풀고 고생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관점이 틀린 것이다. 인지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패턴화되어 있는 자신의 관점을 인식하거나 인지스타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뜻에서 운명이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의 지각은 참 엉성하다.> 

사람이 뭔가를 지각하는 것에는 한계가 많다. 눈으로 보고도 주의를 할당해서 집중하지 않은 것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아르 그림과 같이 주변의 배경이나 보는 측면에서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1번째 그림에서 안의 원의 크기와  2번째 그림의 캐릭터 크기는 같지만 배경 때문에 달라보인다. 3번 째 그림은 회전한 각도에 따라 토끼기 되기도 하고 오리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지각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다양한 보완책을 활용하는데 이것이 인지적 오류를 만들어 낸다. 그 오류를 진실이라고 객관적이다고 믿고 생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의 그림에서 그냥 점과 선, 얼룩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완성시켜서 의미를 부여해서 본다. 비슷한 것끼리 모아서 방향성을 만들어내고 원이나 강아지라고 인식한다. 유사한 것과 인접해 있는 것을 중심으로 지각하고 완성되지 않은 것은 기억에 맞춰 편집한 다음 완성시켜서 지각한다. 지각하는데 효율적이지만 이것이 오류를 만들어 낸다.  지각하는데 한계가 있고 효율적으로 지각하기 위해서 보이는 그대로 보지 않고 왜곡하는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지각하는데 객관성이란 없고, 주관화된 객관성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지적 유연성, 관점의 전환>

우리가 뭔가를 지각하고 인지할 때 유연성을 가지지 못하면 그것이 운명이 된다. 우리는 뭔가를 선택을 할 것이고 그 선택은 주변과 반응하면서 마구 얽혀서 현재의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것이 사실이 되고 그 사실은 자신이 선택하고 메달리는 이유이가 된다.  우리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정보에 맞는 정보만 인식한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인지적 유연성>. <관점의 전환> 같은 것들이다. 그렇지 못하면 나의 노력이 나를 울리고 배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패턴 속에서 반복된 인식을 한다 >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정보에,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정보에 민감하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부정적 정보에 민감한 부정편향(negativity bias)적 경향이기는 하다.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이 중요시하는 정보를 보면 반복된 개인의 패턴과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측면과 정보를 비관적인 사람은 비관적인 측면과 정보를 어쩔 수 없이 우선시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긍정심리학에 불을 붙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긍정주의자와 비관주의자를 이렇게 구분한다. [긍정주의자]는 부정적인 사건의 <원인>을 외부나 상황에서 찾고, <일시적>으로 일어난 일로 보며, <지속되지 않고> 금방 끝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관주의자]는 똑같은 부정적 사건의 <원인>을 자신의 부족함이 한계에서 찾고, <항상> 일어났던 일이며, <지속적>으로 내게 영향을 줄 것이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사건에 대해 비관주의자는 자신이 잘했기 보다는 외부의 환경에 의한 것이고, 어쩌다 일어난 일시적인 것으로, 금방 사라질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긍정주의자는 긍정을 중심으로, 비관주의자는 부정을 중심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패턴화되어 긍정주의와 비관주의를 만든다는 의미다.  객관적으로 떨어져 관찰하지 않으면 이런 패턴을 가진  자신을 구분해서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 익숙한 패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키우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그 반대를 보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의 위협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원인을 찾는데 능숙하고 즉각적인 나?> 

어떤 사건이나 현상의 원인을 찾을 때도 인지스타일이 운명을 나눈다. '걸어가다가 넘어졌다.' 이 사실을 두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조심성 없음에서 원인을 찾고, 어떤 사람은 잘 정비되지 못한 시설이나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어떤 결과의 원인을 자신의 내외부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른 감각과 감정, 생각, 행동을 만들어 낸다. 어떤 결과의 원인을 찾는데 자신에게 유리한 측면에서 해석하면 좋은데 그 어떤.... 무엇때문에 굳이 불리한 원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하려고 한다. 완벽주의적 성향 탓에, 기존의 패턴을 무시하지 못하는 나약함 탓에 어떤 사건이나 행동결과의 원인을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찾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냥 내 버려두고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에 몰두하거나 일어날 사건의 부정적인 면을 확대하여 걱정하면서 대응할 기회와 에너지도 약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깊이 생각하기 싫거나 무지해서,  저항을 만나기 싫어서 애매하면 갖다 붙인다>

애매하면 익숙한 것에 갖다 붙인다. 완성되지 못한 것은 완성시켜서 지각하고, 애매하면 억지로라도 의미를 부여하여 완벽하게 만들어서 인지한다. 이런 것이 부정적인 미신,  종교,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부정적으로 활용되면 더욱 문제다.  인지적 유연성이 낮은 사람들이라도 논리적이고 완전해지고 싶은 욕구, 통제욕구를 가진다. 아니, 인지적으로 유연하지 못할 때 더욱 명확하고 완벽하며 자신이 통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편안해 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에 반박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애매한 사건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투영시켜 버리면 완벽한 통제력을 부여하는 셈이다.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거나, 확인할 수 없지만 해석이 필요한 경우에 잘못된 믿음, 미신, 종교 교리, 이데올로기를 맹신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완전함과 안정감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나를 볼 수 있는 인지적 유연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불안과 걱정, 실패에 대한 두려움, 완벽히 통제하려는 욕구가 방어적이고 한정된 인식을 조장한다.>

불안에 너무 민감할 때는 방어적이게 된다. 그것도 이전의 경험에서 부정적인 면을 방어하기 위한 한정된 인식만 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과잉일반화하기 쉽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라는 등의 완벽한 통제가 오히려 자신을 통제하고 기회를 빼앗아 가기 마련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 놀라는 줄 알지만 막상 현실이 닥치면 세상은 터널의 좁은 공간만 상대하며 불안하고 걱정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만 생각한다. 세상은 방어해야할 단순한 몇 가지로 압축되고 만다. 그래서 늘 힘겨운 시간이 많다. '모든 순간은 변한다' 과거나 기억 속에 있는 상황과 사건은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우선 관찰하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세심하게 관찰하고 파악하고 대응이나 기회를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정적 회상, 강박적 반추는 자기비판적, 비관적 관점에서 인식을 왜곡한다.>

부정적인 일이나 힘겨운 일, 특히 감정을 상하게 한 일은 반복해서 생각한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강박적 반추는 자기 비판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 그 자체를 강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어나 사건이나 감정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눈을 굴리면 점점 눈이 불어나는 것과 같다. 부정적인 일의 회상, 특히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적인 회상은 끊어 내고 다른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차근히 그 회상과 느낌을 글로 적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과 감각의 통합 그리고 전두엽의 판단과 조절 능력을 모두 활성화시켜 주는 것이 글쓰기다. 글을 쓸 때는 부정적 회상이 쉽지 않다. 쓴다면 아주 명확해진다. 그래서 왜곡된 인지를 방지할 수 있다.  


<소탐대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에 걸려 넘어지다>

결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흘려보내도 될 작은 문제에 집착하다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10문제가 있으면 가장 점수가 많은 문제를 풀거나 쉬운 문제를 풀거나 영역과 우선순위가 결과를 좌우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제일 앞에 있는 작은 점수의 문제를 풀다가 정작 풀 수 있는 다른 문제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분명한 인지전략의 실책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에 감정이 상해 취지나 원인을 인식하지 못해서 혼자서만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 대세를 역행하지 않는다면  굳이 씨름하지 않아도 될 것은 쉽게 놓아 버리는 용기이 필요하다. 문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파트 가격이 움직이듯 움직이기 마련이다. 중요해서 만사를 제치고 자신을 멈춰 세운 무넺도 사실은 내 감정이나 과거의 기억이 확대시켜 놓은 것일 수 있다. 중요하기 보다는 나의 감정과 기존의 기억과 충동한 경우가 많다. 전체를 보고 모든 문제를 인식한 다음, 우선순위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전략이나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진지하게 중요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세상은 흐르고 문제에 걸려 넘어진 자신만 보게 될 것이다. 엄청 억울한 생각이 든다. 자신이 무척 미워진다. 


를 힘들게 하는 인지스타일의 공통점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연성이 떨어지고 허용기준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이유야 다양하지만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문제때문에 좁고 네모난 곽을 눈에 갖다 대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줌인, 줌아웃 처럼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나 상황을 떨어뜨려 봐야 한다. 인지하는 사건이나 문제가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이 자신이 되어야 한다. 혹, 당신이 편안해질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의 인지스타일이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브런치의 글들이 <북프로젝트>의 대상을 받고, 책으로 나왔습니다. 브런치의 글과 그 외의 글들이 세련되게 정제되어 나왔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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