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리원 Apr 19. 2024

옷을 보면 그 여자에 대해 웬만큼 알 수 있지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맨 위 큰 서랍에는 청바지며 폴로셔츠,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깨끗이 빨아 주름 하나 없이 단정히 개켜두었다. 두 번째 칸에는 핸드백이며 벨트, 손수건, 팔찌 같은 게 있었다. 천 모자도 몇 개 있었다. 세 번째 서랍은 속옷과 양말이었다. 모든 것이 청결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슬픔에 빠졌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나서 서랍을 닫았다.

"어떻게 생각해?" 그녀가 창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녀에 대해서 말이야"
"만난 적도 없는데, 모르죠" 나는 말했다.
"옷을 보면 그 여자에 대해 웬만큼 알 수 있지" 여자는 말했다.   


 작년 여름 하루키의 단편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다시 한번 곱씹어 읽어보고 옷장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서 버릴 건 모조리 버렸다. 큰 자루로 서너 개 나온 듯했다.  입지도 않을 옷들을 추억, 가격,  언젠가는 등의 이유로 미련을 덕지덕지 묻힌 채 가지고 있었다.  정리하고 심플해진 옷장을 보니, 시간이 지나도 클래식한 템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앞으로의 취향도 이런 방향이리라.



 나는 이 단편을 이십 대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좋아한다.

잔디 깎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남자, 오늘은 그의 마지막 알바날이다. 집주인 여자는 불현듯 그를 집 안으로 들여 딸의 옷방을 보여주며, 그녀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



"남자친구는 있어요" 나는 말을 이었다.
"한 명이나 두 명? 모르겠네요.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요. 문제는....... 그녀가 여러 가지 것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 몸이나, 생각이나, 자기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들이 요구하는 것.... 그런 것들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오후의 마지막 잔디' [중국행 슬로 보트] 수록 p.170



 타인의 옷장을 보고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에 과거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린다.  자기 몸이나 생각, 자신이 원하거나 남들이 요구하는 것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은 그녀. 우리는 어쩌면 나 자신에게 가장 서투른지도 모른다.  무심한 듯 잔디를 깎으며 헤어진 그녀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의식 흐름이 좋다. 현실은 잔디를 깎고 있지만 의식은 과거에 붙들려 있다.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그럴 것이다. 그녀는 헤어지며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몇 년쯤 지나면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몇 년쯤 지난 뒤에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이 문장은 나의 이십 대를 온전히 지켜내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어질 일에 사로잡혀 살지 말자고 다독이며, 다이어리를 장식하기에 좋은 문장이었다.




 뜨거운 여름 한낮.  정성스레 잔디를 깎고,  집주인이 권하는 맥주를 마시는 그를 생각한다.  낯선 사람의 주방과 옷장을 보며 헤어진 그녀를 떠올리는 그를 생각한다. 그저 생각할 뿐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수영을 즐기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만큼 달리기가 루틴으로 정착된 이 바른생활의 작가는 비현실이 주를 이루는 장편소설을 써낸다.  가끔 그 간극이 기가 막혀 웃음이 날 때도 있다.  재즈와 클래식의 상당한 애호가이기도 해서 그가 쓰는 에세이나 단편소설이 뿜어내는 상큼함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이건 어찌할 수 없는 개인적인 취향이자, 내 수준 안에서 최대한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조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키 소설에 섹스 장면이 많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