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맨 위 큰 서랍에는 청바지며 폴로셔츠,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깨끗이 빨아 주름 하나 없이 단정히 개켜두었다. 두 번째 칸에는 핸드백이며 벨트, 손수건, 팔찌 같은 게 있었다. 천 모자도 몇 개 있었다. 세 번째 서랍은 속옷과 양말이었다. 모든 것이 청결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슬픔에 빠졌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나서 서랍을 닫았다.
"어떻게 생각해?" 그녀가 창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녀에 대해서 말이야"
"만난 적도 없는데, 모르죠" 나는 말했다.
"옷을 보면 그 여자에 대해 웬만큼 알 수 있지" 여자는 말했다.
"남자친구는 있어요" 나는 말을 이었다.
"한 명이나 두 명? 모르겠네요.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요. 문제는....... 그녀가 여러 가지 것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 몸이나, 생각이나, 자기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들이 요구하는 것.... 그런 것들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오후의 마지막 잔디' [중국행 슬로 보트] 수록 p.170
앞으로 몇 년쯤 지나면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몇 년쯤 지난 뒤에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