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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리원 Apr 12. 2024

하루키 소설에 섹스 장면이 많은 이유

상실의 시대를 읽어보면

가끔 인스타에서 '하루키 소설은 섹스가 많아서 불편하다'라는 글을 본다. 주로 여성들이며 Z세대가 많다.  (섹스 장면이 많아서 불편하다는 남성 독자는 단 한 명도 못 봤음.. )


20대부터 그의 작품을 읽어온 나는 섹스 장면이 딱히 불편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땐 오히려 '남자들의 심리는 이렇구나' 내지는 '아 일본인들에게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인 건가?'라며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겼다.



특히 <상실의 시대>는 '아니 뭐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섹스 장면이 잦다.  사랑하는 언니와 연인마저 자살로 잃은 나오코는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와타나베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아무나하고 명분 없는 섹스를 한다. 나오코는 죽은 연인과는 잘되지 않았던 성관계를 와타나베와는 쉽게 이룬다.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지만 와타나베는 여전히 다른 여자들과 섹스한다. 심지어 이야기의 말미에는 이 모든 서사를 알고 있는 레이코와도 섹스한다. (이 부분은 정말 중년인 지금도 노이해)




 나는 섹스야말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분명한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가족과 연인의 죽음을 겪고 자신도 정신병원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오코. 그녀를 병문안 가는 와타나베. 그들에게 섹스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친구와 연인을 동시에 잃은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껴야 하니까.



 한 예로, 윌리엄 스타이런의 책 <소피의 선택>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소피가 섹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의 섹스에 대한 집착은 무섭도록 광기에 가깝다.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 나온 후 삶에 대한 갈망이 본능적으로 표출된 것이라 보여진다.  여기서 섹스는 성적인 욕구라기보다는, 살아있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 안에 표현된 섹스는 다소 슬프다.  죽음과 상실을 이겨내고자 하는 몸짓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오코는 '우물'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럼에도 와타나베는 여전히 섹스를 하며 씩씩하게 현실을 마주하고 산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상실의 고통 뒤에 위로 혹은 치유처럼 섹스가 따라오는 모양이 꼭 공식 같다는 느낌은 어쩐지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독자들 중에서도 섹스 장면에 불만을 가진 독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하루키는 그럼 당신들은 어떻게 섹스하냐고 물었다. 다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하루키도 어느 정도 의식은 했던 모양인지, 최근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섹스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의 장편에 이런 일이 있다니 나는 내심 놀라기도 했다.  



 하루키의 상실을 다룬 작품 중에서 섹스가 나오지 않는 담백한 작품이 또 있다. 바로 그의 단편 <하나 레이 만>이다.


서핑을 즐기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 사치는 그 후로 해마다 아들이 죽은 하와이 해변에 가서 앉아있곤 한다.  어느 날 다른 서핑객으로부터 외다리 서핑남을 보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게 아들의 유령임을 직감하지만, 어쩐지 이 아들 유령은 어머니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사실 어머니는 모자지간으로 아들을 사랑했지만, 하나의 인간으로 아들은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끝내 아들 유령은 어머니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어머니는 자신에게 그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아는 건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이 이 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공평하든 불공평하든, 자격 같은 것이 있든 없든 있는 그대로. 하나레이만, 무라카미하루키, 도쿄기담집(문학사상사)





공평하든 불공평하든, 상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는 일상과 존엄. 이것이 선행되어야 성찰이 따라온다는 걸 하루키는 짧은 단편을 통해 보여준다. 나는 하루키의 이런 시선이 좋다. 편향적이지 않은 엄마와 그런 엄마를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는 아들.  이 뻔하지 않은 신선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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