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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드 May 06. 2023

더 이상 어린이는 아니지만

“엄마, 어린이날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요!”

“너 더 이상 어린이 아니시거든요. 청소년님!”

“아니.. 엄마, 아빠에게 언제까지나 아이, 그리고 마음은 어린이예요.”

“됐거든요!!”

“흥!!”

“뭐가 갖고 싶은지 들어나보자!”

“음…. 그게 뭐냐면….. 말해도 안 들어줄 것 같은데..”

“밑져야 본전이야. 말 안 하면 얻을 확률 0%, 말하면 얻을 확률 최소 1%는 되지 않겠니?”

“그러니까.. 그게…..”

“됐어 됐어 됐어!!”




어린이날이 가까워오자 중2 아들은 어떤 선물을 해 줄 거냐며, 아니 선물을 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 이제 청소년이신 분이 어린이날을 챙겨달라고 하다니… 세상에!!

아직은 만 13세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들먹이며 생각보다 당당하고 집요하게 선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떤 선물이 받고 싶은지 물어봐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들려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닌가 보다. 혹시.. 또봇이니?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또봇! 자율주행 자동차가 위기 상황에 로봇으로 변해 대도시라는 도시를 악의 무리에서 구해낸다는 다소 뻔한 이야기다. 이 만화 덕분에 또봇 장난감은 불티 나게 팔렸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슨 날만 되면 그 자동차를 자연스럽게 사주게 되었다.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 심지어 치과 치료를 잘 받았다는 이유로 선물을 해 줬었지. 신줏단지 모시듯 모셨던 그 장난감은 아이가 크면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고 그 자리는 레고, 드론, 보드게임이 차지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작년에 갑자기 또봇에 다시 꽂혔다. 유튜브로 만화를 시즌 1부터 정주행을 하더니 급기야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가세븐”을 (일곱 대의 자동차가 합체하여 천하무적 로봇으로 변신하는 장난감) 사달라고 한 것이다.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이 아이… 진심이다..



남편과 상의 끝에 그래, 아이 좋아하는 거 해 주자. 그렇게 원하는데 해 주지 뭐! 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해 줬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어릴 때는 변신작업을 부모손에 맡겨 환장하게 만들었는데 중1인 아이는 이제 스스로 척척척 변신을 시켜준다. 와… 변신 로봇은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에게 권장하지 않습니다. 초등 고학년이나 중등정도가 딱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나 좋아하고 좋아하던지…. 잠자리까지 그 아이를 들고 갈 줄이야!!



그래서.. 혹시… 이번 어린이날 선물도 또봇인가? 싶었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이는 다시 선물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하는 선물이 뭐냐고!!”

“이름이 네 글자인데 엄마…”

“델타트론이니?”

(이 아이도 또봇 변신 로봇 중 하나이다)

“아니오.”

“그럼… 혹시…. 로블록스 현질이니?”

(로블록스 :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

현질 : 온라인 게임 따위에서 유료 아이템을 사는 일을 이르는 말.)

아들 입틀막…..

“엄마, 혹시 예언자세요? “



아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크지 않은 눈이 온 세상 다 담을 만큼 커졌고 벌어진 입은 다물지를 못했다. 신랑과 나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신랑은 그걸 어찌 알았느냐며 신기해했다. 그러게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만 너는 내 손안에 있소이다 하는 심정으로  ”엄마가 모르는 게 어디 있더냐 “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는 그때부터 왜 자기가 로블록스 현질을 해야만 하는지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하다가는 식사가 끝나지 않을 것 같기에 한 마디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왜 로블록스 현질을 해야 하는지, 그 현질한 게임 머니로 무엇을 할 것인지 사업 계획서 작성해서 갖고 오렴. “

”네!! “

이 아이, 너무 진지하다..



저녁을 먹자마자 방으로 가던 아이는 노트북을 열고 파워포인트를 실행한다. PPT를 만들어서 진지하게 PT를 할 모양이다. 너무 진지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 아빠를 반드시 설득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 자판을 두르리는 손가락에 뚝뚝 묻어났다.

귀여운 것!!!


”엄마, 아빠는 산책하고 올 테니까 열심히 만들고 있어. “

”네! “




아이를 뒤로 하고 신랑과 팔짱을 끼고 산책을 나왔다. 비 예보가 있어 그런지 공기가 물방울이 담긴 것처럼 무겁다. 혹시 몰라 걸치고 나온 겉옷이 덥게 느껴졌다. 날씨가 변덕을 부려도 5월이다. 초여름 5월.

신랑과 커피 한 잔씩 사들고 동네를 걷는다.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해 줄 마음이 있는지 물어본다. 아이가 원하는 선물이나 필요한 물건을 사야 할 때 단독으로 결정 내리지 않는다. 아이의 요구가 있으면 엄마 아빠가 상의하고 알려준다고 말해준다. 부모가 함께 상의하고 결정하는 것. 그것이 원칙이다. 5 천보가 넘게 걷고 들어오니 아이는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부모를 바라본다.


”방금 다 만들었어요! “


목소리에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 담겨 있다. 오랜만에 보여주는 신나는 얼굴. 활기찬 표정에 봄날 피어나는 새순 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저리 좋을까..

식탁 의자에 부모를 앉히고 진중하게 만든 자료를 보여준다. 그 짧은 시간에 효과까지 넣고 꽤나 정성 들여 만든 티가 났다.



”로블록스 현질을 해야만 하는 이유“ 이것이 제목이다. 현질을 해야만 하는 이유라니… 깜찍한 녀석!

결론은 현질을 해서 게임 아이템을 사고 게임 캐릭터를 꾸며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게임 캐릭터의 옷을 제작해서 팔고 싶다는 야망도 드러냈다. 돈을 벌어 게임 세계를 더 넓히고 싶은 모양이다. PT가 끝났고 부모인 우리는 박수를 쳐 줬다. 잘 만들었네 수고했어라는 말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공은 부모인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아이가 원하는 현질은 현금 만 원도 되지 않은 금액이었다. 레고나 로봇 장난감에 비하면 참으로 작고 귀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해 주지 못했다. 혹 이것이 버릇이 될까 봐, 자꾸 현질을 해 달라고 할까 봐, 게임에 더 깊이 빠져들까 봐. 기우일 수 있고 노파심일 수 있다. 부모가 되니 왜 이리 작은 것에도 마음이 쓰이는지…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어떤 결정을 하든 아이는 받아들일 것이다. 환호 아니면 탄식,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리라. 부모인 우리는 아이가 환호하길 바라면서도 인생에 매번 환호만 있을 수 없음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이 작은 결정에도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다. 작은 고민, 작은 선택. 심각하지 않은 고민이라 즐겁게 웃으면서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데? 해 본다.




5월 5일 어린이날이 찾아왔다. 청소년이지만 아직은 내 품속 꼬물이 같은 아이에게 ”어린이날 축하해 아들! “ 했더니 씨익 웃는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 웃음 오래 보고 싶다.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 있게 즐긴 어린이날 아침, 신랑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영화가 개봉을 했다며 보러 가잔다. 영화 관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반갑지 않은 제안.



“시우랑 둘만 가고 난 카페에서 책 보면 안 돼?” 하며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하니 흔쾌히 그러란다. 그것이 더 싸게 먹히는 걸 아는 게지. 둘을 극장으로 보내놓고 난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브런치에 올릴 글도 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더없이 평온하고 다정한 시간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면 통창 너머로 보이는 초록초록한 나뭇잎과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과도 잠시 눈과 마음을 맞춰본다. 더 푸릇하게 자라렴. 대지를 더 많이 적셔주렴. 작은 바람도 속삭여본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PPT까지 만들어가며 부모를 설득시킨 아이에게 오케이 사인을 해 줬다. 그 순간 아이 얼굴에 퍼지던, 온 세상 다 가진 것만 같은 만족감. 그 얼굴에 내 가슴이 뻐근해져 온다. 아이 덕분에 하나씩 배운다. 큰 이벤트가 아니라 작고 소소한 일들도 삶에 커다란 만족을 준다는 것을. 아이가 보여주는 활짝 웃는 미소가 부모에겐 그 어떤 것보다 큰 선물이라는 것도. 선물 하나로 세상 다 가진 듯한 아이. 나도 아이 덕분에 온 세상 다 갖는 기분이 든다. 그 웃음이면 됐다. 그 웃음이 내 세상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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