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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Aug 05. 2020

안녕? 나 결혼해!

그런데 왜 놀라지 않아?


사회생활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특이한 사람도, 특이한 상황도 많이 만났다.


남초 회사에 얼마 되지 않는 여자 동기들은 애틋하다기보다 오히려 불편한 상황으로 자주 다가왔다. 어렵게 입사한 대기업이니 만큼 작정하고 생색이라도 내려는 듯이 한 두 달치 월급을 훌쩍 넘는 명품백을 걸치고 앉아 여름휴가, 겨울 휴가 비행기 티켓 예매 이야기부터 각 부서 선배들 험담까지. 전혀 나와는 맞지 않는 주제들로 넘쳐났다.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고 앉아서 가만히 들어주는 그 시간조차 나에겐 사회생활의 관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성향도 달라 친하지도 않았는데, 단 하나 '입사동기'란 카테고리에 묶여 꾸역꾸역 모임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야근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뜯을 때쯤..

'이 친구가 왜 이 시간에..' 란 생각이 들 만큼 친하지 않은 그 동기 무리들 중 한 명(A)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여보세요?"

A.  "응, 안녕? 나 xx야~ 근데 놀라지 마.. 나 결혼해!!"

일 년에 한 번 통화를 할까 말까 한 사이에, 늦은 시간에 전화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그동안의 안부인사는 1도 없이.. 들려온 수화기 너머의 목리는 이미 잔뜩 흥이 나있다.


나. "오, 그래? 축하해~"

A.  "응 근데 부서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몰라. 그래서 좀 조심스러워"

사적으로는 궁금할 것도 딱히 없을 정도로 어색한 사이인데 이 시간에 전화할 곳이 나밖에 없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적당히 축하해주고 끊으려던 찰나.. 의외의 대화가 이어진다.


A.  "그리고 남자 친구가 나보다 학력이 낮아. 전문대졸이야"

나. "응, 요즘 그런 거 누가 신경 쓰니. 사람이 괜찮으면 됐지. 축하해~"


A.  "그런데.. 넌 왜 놀라지 않아?"

나. "응?? 뭐가??"
A.  "내가 나보다 학력 낮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나. "아.... 그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A.  "다들 놀라던데.."


그 순간 피곤감이 싹 날아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반응이 아닌 것에 대한 떨떠름함을 표현한 A와  짧은 통화를 끝내고 아직 입도 안 댄 맥주캔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놀라는 척이라도 해줬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학력이라.. 입사 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를 이런 상황으로 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 회사는 국내 최고의 대기업답게 학연, 지연, 혈연을 지양하기 위해 사내에서는 일절 출신학교를 대놓고 묻지 않는 게 문화였다. 그래서 실제로도 가까운 선후배더라도 직접 본인이 말하기 전에는 각자 어느 학교 출신인지 알지 못했다. 물론 가끔 유치하지만 자신의 출신 학교를 너무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주로 학교 동문회 소식지를 회사주소로 받게끔 해놓거나, 동문회 메일을 회사 메일로 받는 사람들이었다. 회사에는 해외 유명대학의 석사, 박사 출신부터 특성화고나 상업고를 졸업하고 19살에 입사한 어린 사원들도 있었는데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만 했지. 누가누가 더 학력이 좋나를 신경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걸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결혼할 남자 친구의 학력이 자신보다 낮다고 푸념했던 A가 대단한 학력, 학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적당한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사출신.)


그 이상한 통화가 있고 며칠 뒤, 청첩장을 나눠주기 위해 A는 입사'여자'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동기들 중엔 A와 특히 친한 B가 있었는데, 둘은 사소한 취향들이 잘 맞았다. 줄줄 꿰고 있는 명품가방들과, 그 가방 속에 줄 세운 듯 각 잡힌 파우치, 롤 빗, 레이스 달린 손수건, 저게 가방에 들어가? 할 정도로 큰 손거울.. 등. 역시나 B는 A의 대화에 가장 열심히 맞장구를 쳤고.. 마치 학력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결혼까지 결심했어~? 너 대단하다~ 란 뉘앙스의 반응을 해주자..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A가 이런 표정으로 말한다.


"사실.. 나 딱 하나 봤어. 얼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 친구란 사람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도 B는 "그래? 그래? 얼마나 잘생겼는데?? 사진 있어?? 보여줘~ 보여줘~"

그 정도 되니 내가 이상한 건지, 그들이 이상한 건지가 헷갈리는 상황..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과 정신이 천근만근..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야근한 날보다 2시간 앉아있던 동기모임 자리가 나에게 열 배는 더 힘들었다.


이후 자연스럽게 거리두기(?)를 한 덕에 이젠 더 이상 사적으로 만날 일 없는 동기 A는 몇 년 전 아이 엄마가 되었고, 그의 SNS에는 가족사진 대신 허세 가득한 여행지 사진, 호텔 뷔페 사진, 유명 커피숍의 한정판 굿즈 사진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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