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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Dec 16. 2020

퇴사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몹쓸 전략

얼마 전 옆 부서 과장님이 퇴사하셨다. 부장 진급을 앞둔 상황에 그동안의 고과도 좋았다는데.. 모두 의아해하는 와중에 들려온 사유는 '가업을 잇기 위해'.


퇴사하는 것도 부러운데, 이을 가업이 있다는 것은 더 부럽다며 점심시간 휴게실에 삼삼오오 모여 조촐한 송별 티타임을 가졌다.


무슨 가업일까나.. 궁금한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과장님이 들려준 것은 의외의 이야기였다.



- 우리 회사에 고과가 몇 가지 있는지 알아?


- 4개 아녜요? 가나다라. EX VG GD NI 이렇게.


-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아니야. 우리가 모르는 하나가 더 있어.


다들 물음표 가득인 표정으로 의아해하자


- UN.


- 넹?? 국제기구 아니에요? 유엔. 무슨 약자예요?


- Unnecessary. 일명 '마'지 '마'. 가나다라 '마'.


- 헐.. 설마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ㅠ ㅠ 불필요하다니...


- 진짜야. 있어. 그런데 이런 건 정~~~ 말 엄청난 사고를 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보통의 사람은 못 받지.


- 근데 과장님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 내가 이걸 받았으니까.


오잉!?!? 아까 고과 좋다고..


- 이걸 받으려고 작년부터 미리 전략을 세웠지. 희망퇴직을 하려면 어쩔 수 없어서 팀장님께 이걸 달라고 했어. 보통 각 팀에 할당되는 고과 포션이 있거든. 받으려는 사람이 없으니 늘 골치 아픈데 올해는 내가 자진해서 받겠다고 했으니 팀장님도 수월해지신거지..


- 그럼 희망퇴직이 되요??


- 응, 잘 들어. 퇴사할 때 절대 먼저 인사과에 찾아가거나 연락하면 안 돼. 인사과가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이 고과를 받으면 연락이 오게 되어있어. 인사과에서도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도 그 해 할당량을 채우는 게 자신의 업적이니까.


- 연락이 오면요??


- 가서 만나는 거지. 그만둘 생각이 없다는 자세로. 그럼 거기서 한 번은 돌려보내고 두 번째 다시 불러서 조건을 제시해. 몇 년 치 연봉에 학자금 얼마 주겠다고. 그걸 들어보고 협상하는 거지. 나도 이때까지의 고과가 좋다 보니까 의아해하긴 하더라고. 두 단계 이상 고과가 곤두박질 치면 질문도 많아. 그래도 끝까지 모른 척 잡아떼야 돼. 대신 근태나 다른 기본적인 사항을 어기지 않아야 협상이 가능하겠지.  


ㅎㄷㄷ 그렇게까지..

다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하자..

 

- 어차피 인사과도 그 해에 퇴사시켜야 하는 인원 TO가 있다니까. 이게 전혀 미안해하거나 쪽팔려할 일이 아니란 거지. 만약에 퇴사를 한다면 꼭 이렇게 나가는 걸 추천해. 안 그럼 자기만 손해야.  




몇 년 전 공장 자동화가 되면서 제조직 여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엔지니어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들었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이 있는데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회사가 나쁜 걸까

이렇게라도 스스로 살 길을 강구하는 개인이 나쁜 걸까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건

배가 덜 고픈 걸까 내가 호구인 걸까


러모로 술이 땡기는 하루였다.



* 참고: UN 의 원래 약어는 Unsatisfactory 임 (불만족스러우니 불필요하겠지.. 그거나 그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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