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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Aug 09. 2020

여성'리더'이지 여성'아이콘'이 아닙니다

언론과 현실의 괴리 2


잊을 만하면 '여성 임원 비율을 늘리겠다' '여성 리더를 키우겠다' 등의 뉴스가 나온다. 그러면 사내에서는 부랴부랴 얼마 없는 여자 부장, 임원들을 데려놓고 '선배와의 대화' 같은 간담회 자리를 만든다. 보통 그런 자리는 유연한 근무 환경의 간접 부서, 지원 부서(General 직군)에서 주로 참석하고 정작 엔지니어들은 바쁜 업무로 참석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거기에 때맞춰 아침 임원 미팅에서 한 소리 들은 것 같은 부서장은 심드렁한 말투로 "우리도 차세대 여성 리더들이 참석해봐야 하지 않겠나?"며 업무 조율 따위는 없는 '나는 시키는 대로 일단 말은 했다' 식의 무책임한 단어들을 허공에 쏘아놓는다. 그러면 정해진 레퍼토리처럼 그에 장단 맞춰 한 마디 거드는 남자동료. "왜 남자 선배들과의 대화는 안 합니까?? 이거 성차별 아닙니까?!" 이젠 이런 시나리오도 지긋지긋하다. 다음엔 참신한 걸로 좀 안 되겠니.


이런 가시방석 같은 상황에도 부서별 참석률을 확인한다는 인사과의 협조(?)에 떠밀려서 간담회를 가보면 분명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하는 마치 성공신화 책을 읊는 것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입사 때 여자 동기가 얼마 없었는데, 그나마 있던 동기들도 과장을 달고는 모두 나가서 지금은 전업 주부가 되어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만큼 독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일 했기 때문이다. 출산휴가 3개월 만에 복직을 하고 아이가 어릴 때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었다고 연락을 받았는데도 그날 밤 11시까지 근무했다.. 마치 '이 정도 못할 거면 너희는 꿈도 꾸지 마'란 식의 자기 신화적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듣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지는 경우가 많다. 기대했던 것은 조직 내 성차별, 성희롱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육아와 업무를 지혜롭게 병행하는 노하우 같은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문제에 대한 공유였는데..


어느 회식자리의 말미, 평소 친분이 있던 부장이 나를 구석으로 끌고가서 말한다. "홍 과장, 우리 부서로 와. 내가 키워줄게"  밑도 끝도 없는 스카우트 제안에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들어봐, 지금 우리 부서만 여자 부장이 없어. 요즘 같은 회사 분위기로는 여자는 절대 부장 진급 누락 안 시켜. 그냥 있으면 진급하는 거야." 찰나의 내 표정을 읽은 부장은 다시금 달래듯 "아니 홍 과장 일 잘하는 거야 다 아니까 그냥 우리 부서로 와, 응?" 하며 재차 묻는다. 이런 기승전결 없는 어이없는 상황도 웃으면서 넘겨야 사회생활의 계급장을 달게 되는 걸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돌아서던 나는 몇 차례 더 붙들렸고 집으로 가는 퇴근버스가 오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사적인 자리에서 친한 선배들에게 내가 겪은 상황을 말했더니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모아 말한다. "바보야! 간다고 했어야지. 그걸 왜 거절해?? 게다가 남들은 못 가서 안달 난 편한 부서잖아. 내가 가고 싶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날 데려가라 그래."


업무 능력이며 개인 역량이 밀리지 않는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부서에 여자 부장의 '아이콘'이 되어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그런 반응이 나는 가장 안타까웠다. 그들 말처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걸까.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사회생활을 덜 한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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