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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Aug 10. 2020

악마를 보았다

학교 폭력의 기억


나는 '국민학교' 마지막 세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초등학교'라고 적힌 현판이 학교 정문에 걸렸다. 마치 바뀐 현판 하나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공식화되는 듯했다. 국민학교 6학년, 그 해의 기억은 내 인생의 전반을 뒤흔들 정도로 강렬했다.


갓 우리 학교로 전근 온 40대 초반의 담임은 당시로써는 꽤 파격적인 수업 방식을 선보였다. 모두 칠판을 바라보게 앉아 2명씩 짝지어진 다른 교실과 달리, 우리 반은 6개의 책상을 서로 돌려 앉아 이른바 '모둠'을 만들어서 1년 동안 생활했다. 한 모둠은 5-6명으로 구성되어 총 8개의 모둠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는 한 반에 40-50명이 기본이었다)


모든 수업은 모둠 활동이 기반이었고,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반나절을 통째로 빼 담임이 정해준 주제로 모둠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개별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한 산수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둠별 사전 과제 수행 후 수업시간에는 모둠별 토의, 발표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런 활동을 하던 당시에도 꽤 신선한 수업방식이라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매일 쓰는 개인 일기장과 더불어 모둠 일기장을 만들어 5-6명의 모둠원이 하루씩 돌아가며 일기도 썼다. 거기엔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쓴 아래쪽에 코멘트도 달아주도록 하여 부모님의 참여도 이끌어냈다. 친구의 부모님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신선했고, 지금도 이건 굉장히 좋은 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둠은 5명이었고, 키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키도 다들 고만고만했다. 그중 유독 키가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A)가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귀여운 외모로 담임의 관심을 꽤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아이의 엄마는 나이차가 열 살 나는 동생을 업고 자주 교실을 방문했다. 엄마는 상당히 미인이어서 처음 방문했을 때 담임은 한눈에 보고 A의 엄마인지 알 수 있었다며 교실로 돌아와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만 해도 학부모가 선생에게 촌지를 건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6학년은 학교에서 제일 높은 4층의 교실을 사용했는데, 한창 수업 중인 시간에도 복도 쪽 창으로 학부모가 보이면 선생들은 버선발로 달려 나가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난(蘭) 화분과 봉투가 손에 들려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첫 한 달은 낯선 환경에 서로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흘러갔고, 두 달 때부터 슬슬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A는 모든 모둠활동을 본인 위주로 하길 원했고, 심지어 본인이 시간이 안되어 4명이 따로 과제를 위해 모임을 가지면 극도로 흥분하여 보복을 하기도 했다. 그 보복은 '왕따'로 시작되었다. 모둠 일기장의 부모님 코멘트는 보통 엄마, 아빠가 번갈아가며 작성해주었는데 B는 늘 엄마가 작성해주는 걸 이상하게 여긴 A가 어느 날 교실에서 B에게 "야, 너 아빠 없지?" 라며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이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은 B는 "아, 아니야.. 아빠 지금 출장 가있어"라고 말하자 A는 "거짓말! 그럼 아빠랑 찍은 사진 가지고 와봐!" 당시 나도 그 장소에 있었지만, 그 순간 너무 6학년 같지 않은 수준 낮은 대화란 생각을 했다. 아직도 그때 B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A는 특히 B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했는데 모둠 준비물을 일부러 B에게만 알려주지 않고는 담임에게 B가 모둠활동을 불성실하게 한다고 이르거나, 쉬는 시간에 B가 다른 모둠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나누는 걸 보고는 수업시간에 일부러 난감한 발표를 B가 하도록 몰아간다든지.. 등의 지금 생각해보면 13살 치고 아주 교활한 수법을 주로 사용했다. 나를 가장 충격받게 만든 사건은 따로 있었다.


어느 날 A는 그런 괴롭힘이 재미없어졌는지 갑자기 B에게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게 굴며 '사실 나는 너와 베스트 프렌드가 되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어' 란 식의 말을 하며 B와 친해졌고, 영문을 몰라하던 B는 그렇게라도 얻은 친구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모둠원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나중에 보니 이 초대도 B의 자의가 아니라 A가 시켜서 한 것) 하교 후 모두 B의 집에 몰려갔는데 내가 현관에서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A는 B의 책장으로 달려가 앨범을 꺼내오더니 우리들 앞에 펼쳐 보이며 "자 봐봐, 너 아빠 사진 어딨어? 없잖아! 너 아빠 없으면서 왜 거짓말했어?!" 하는 게 아닌가. 이에 B는 주저앉으며 엉엉 울었고, 적반하장으로 A는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B를 노려보았다.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속이 메슥거려서 누워만 있었다. 엄마는 힘없이 쓰러진 내게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었지만 대답할 힘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날 밤 일기를 적으며 A는 악마일 것이라고 여러 번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B는 그 일 뒤로 학교에서 말문을 닫았다. 나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어 준비물이 있는 날은 따로 B에게 전화를 걸어 알려주고, 수업시간엔 발표 자료도 공유해주었다. 이를 못마땅해한 A는 이번엔 타깃을 나로 바꾸었고, 비슷한 수법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유는 나는 당시 반에서 산수는 1등이었고(국민학교 때는 산수만 잘하면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여겼다), 무엇보다 시험기간엔 다른 모둠 친구들이 일부러 우리 집까지 와서 같이 공부를 하려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기존 수법이 통하지 않자 회유책으로 바꾸었다. A는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서점에서 어린이 명작 소설을 샀는데 그때마다 나를 불러냈고, 심지어는 자신이 다니던 유명 영수학원을 그만두고 내가 다니던 허름한 속셈학원에 따라 등록을 했다.  


2학기가 되자 그동안 A의 악행들이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반에서 A의 평판은 안 좋아졌고,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A는 1학기 때와 다르게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졸업을 하며 우리 모둠에서 나만 다른 중학교로, 나머지 4명은 같은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1년 동안 같이 쓴 모둠 일기장은 4-5권이 되었는데 모두 A가 가져갔다. 그렇게 국민학교의 마지막 기억이 지워지고 있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고서도 세 달 동안은 이웃 아파트에 살던 A가 저녁이면 놀이터로 나를 불러냈다. 그 자리엔 A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B도 같이 나왔는데, 딱 봐도 불량학생 같은 외모를 하고(깻잎머리와 짧은 치마) 나에게 담배를 권했다. B는 폭력에 무기력해진 것처럼 A가 시키는 대로 했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이 힘들다며 국민학교 때가 좋았다는 A의 1도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몇 차례 들어주고서야 A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이때쯤 읽은 책이 데미안이다. 나의 상황과 싱클레어가 겪은 상황이 너무나도 비슷해 아직도 데미안은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책으로 남아있다. 싱클레어의 구원은 데미안이란 외부 요인이었지만, 나의 구원은 내부에서 시작되었던 게 차이라면 차이.  


이후 중학교 2학년 때 다른 친구들을 통해 들려온 A의 소식은, 역시나 학교에서 유명한 불량학생이 되어 남학생들을 따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일탈을 저지르다가 수습할 수 없는 사고를 쳤는지 아빠의 손에 이끌려 캐나다로 강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이후 도피유학 가는 학생들을 다시 보게 됨)


당시 그 아이의 아빠는 대기업 과장이었다. A는 이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는데 매주 5천 원의 책 구입비로 명작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고 독서감상문을 쓰는 게 아빠와의 약속이라고 했다. 거기에 당시로는 꽤 비싼 소규모 인원의 영어학습지 하는 것을 과시하기도 했다. A의 아빠가 사교육에 꽤 관심을 쏟은 걸 알 수 있었지만, 정작 인성교육은 실패했다는 걸 A를 보며 분명히 알 수 있었다. A의 아빠는 IMF 직후 퇴직하여 개인 사업을 시작했고, 꽤 성공하여 현재 직원 200명 규모의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그가 어떤 마인드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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