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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Sep 05. 2020

여행지에서 아이돌을 만나면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작년 봄, 어느 항공사 프로모션으로 추석 비행기 티켓이 굉장히 저렴하게 풀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다 근무 때문에 보통 6개월 앞의 여행 계획은 세우지 않는 편인데 (늘 여행 일정 임박해서 비행기, 숙소를 예약하는 본투비 호갱ㅠ) 만에 하나 그냥 날릴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메리트 있는 가격에 덜컥 예약을 해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9월 출발 당일. 추석을 끼고 가는 터라 가족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한국은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이었지만 목적지는 지구 반대편 남반구라 두꺼운 겨울 옷을 챙겨야 했다. 몇 벌 챙기지도 않았는데 상당해진 부피의 짐을 보고 택시기사님은 어디 이민 가는 거냐고 물으셨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정확히 24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청정국답게 검역이 상당히 오래 걸려서 어둑해질 무렵에야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뉴질랜드는 곳곳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배려 넘치고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오랜만에 하는 우측 운전도 쉽게 적응했고, 상쾌하다 못해 폐까지 얼얼해지는 시원한 공기에 '그래 이게 뉴질랜드지'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예전엔 모르고 당했던 여행자들을 노린 과속위반 딱지, 주정차 위반 벌금은 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많이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작은 시골마을의 변화는 6년 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내겐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그 사이 생겨난 수많은 호텔, 호스텔, 식당과 줄지어 들어오는 관광버스만큼 늘어난 관광객들.. 예전 모습 그대로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 이기적인 생각이겠지..



그리고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던 곳. 6년 전엔 기상 악화로 아쉽게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곳. 마운트 쿡(Mt.Cook).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트래킹을 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여러 가지 트래킹 코스들이 있는데 나는 완만한 코스의 무난한 hooker valley track을 선택했다. 이정표에는 왕복 3hr로 표시되어있지만, 중간중간 경치 구경하며 사진 찍고 호수의 빙하도 만져보려면 넉넉하게 4hr를 잡아야 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진눈깨비 날리는 궂은 날씨에 가져간 옷을 다 껴입어도 오들오들 떨 만큼 추운 날씨였는데 마치 산신령님(?)이 허락이라도 해준 것처럼 당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쾌청했다. 완만한 트래킹 코스지만 걷다 보니 땀이 나서 옷을 하나씩 벗어야 했을 정도.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도중 곳곳에서 검은 옷차림의 동양인들이 무전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단체여행객인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던 중


"네, 여기는 지금 5명 정도 있고 중간 위치에는 15명 정도 있습니다"


응..? 방금 한국어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비수기에다 원체 한국인 여행객이 잘 없는 곳이었고, 여행 내내 한국인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처음엔 잘못 들었나 보다 하며 정상인 hooker 호수까지 올라갔다. 쉼터로 이용되는 벤치에 앉아서 싸온 바나나와 사과로 당 보충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선명한 한국어가 들려온다.


hooker 호수의 쉼터 (우측은 하산하는 사람들)


반가운 마음에 돌아보니..

쉼터를 지나 내려가는 아이돌님들 (셀카봉을 하나씩 들고 있음)


여러 명이 셀카봉을 들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왕.. 그렇게 걷고도 쉬지 않고 바로 호수로 내려가다니.. 젊은 친구들이구만.. 부러운 체력이다.. 생각하며 남은 사과를 마저 먹고 있는데 옆의 친구가 조용히 말한다.


"우리나라 연예인 같은데.."


회사 행사 때 유명 연예인들이 초청되어 오긴 했지만.. 저만치 멀리서 보면 면봉이나 다름이 없었고, 실제 연예인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엥?? 누구??"


"방탄"


"방탄이 누구야?"


"(깊은 한숨) 아이돌 있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인가.. 그렇다고 한숨까지 쉴 필요가 있나.. 원체 연예인에 관심 없는 나라는 걸 아는 친구는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했다.


간단히 배를 채운 나는 빙하가 떠내려온 호수로 내려가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으로 보내며 한국 연예인도 같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어쩐지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추석 때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았나.. 걱정을 잠시 하고는 다시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뉴질랜드의 자연은 어디나 멋지지만 마운트 쿡은 그중에서도 정말 압권 그 자체였다.


이따금 아이돌이 있는 쪽에서 노래를 부르는지, 구호를 외치는지 한 번씩 소리가 나서 쳐다보게 됐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연예인이라길래 싸인을 받아둘까.. 하는 물욕적인(?)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개를 돌리면 그런 마음을 먹은 자신이 민망해질 만큼의 멋진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머나먼 타국에서, 이런 멋진 날, 이토록 황홀한 경치를 같이 보고 느끼고 있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졌다.


막내 동생뻘 되어 보이는 아이돌들도 휴가를 왔나 보다 싶어 나처럼 힐링하고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자리에 있던 여행객들 모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여행객들 뒤로 보이는 촬영팀과 BTS
멀리서 찍은 풍경에 잡힌 BTS멤버들 (우측 사진 출처 - 방탄소년단 공식 트위터)



귀국 후 여행 선물을 가족들에게 나눠주는데 엄마가 묻는다.


"거기서 연예인 누구 봤다고??"


"BTS"


"가수야?"


"응, 방탄소년단"


"뭐라고?!?!?! 방탄소년단이라고!?@@?ㅁㄴㄸ!(흥분) "


"응, 그때 톡으로도 말했잖아"


"근데 싸인도 안 받고 사진도 안 찍었어?! 왜!! 왜!!!!!! 이 바보 !&^#*&! @(#*!(@*#$(심한말)"


"쉬러 온 것 같더라고.. 우리도 쉬는데 누가 와서 귀찮게 하면 그렇잖아. 그건 매너가 아니지. 근데 그날 내가 사진 보내면서도 말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대?"


"엄마는 네가 말한 BTS가 방탄소년단인 줄 몰랐지...."


정말 웃픈 가족의 대화였다.


엄마는 방탄소년단은 알았지만 'BTS = 방탄소년단' 은 매칭이 안되어있던 것이다. 그래도 아이돌은 아무도 모르던 엄마가 방탄소년단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 집에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귀국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BON VOYAGE4라는 예능 촬영을 위해 간 것이었다...)



선거철이면 후보자들이 시장이며 동네 곳곳을 돌며 악수하러 다니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우연한 계기로 접한 그들은 어느새 다른 연예인들보다 친숙하게 느껴졌고 노래도 찾아 듣다 보니 세계적인 인기가 이해가 됐다. 무엇보다 인터뷰에서 엿보이는 그들의 건전한 생각과 마음가짐은 존경심이 나올 정도였다. 이번에 나온 신곡도 정말 좋다 생각했는데 빌보드 1위의 영예까지 안다니.. 그들의 그동안의 노력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모쪼록 바라는 것이 있다면.. 늘 지금처럼 변하지 않고 존경스러운 아티스트로 남아주기를. 무엇보다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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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경치가 찍힌 BON VOYAGE4를 보고 싶어 너튜브며 검색 엔진 곳곳에서 검색했지만 아직도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대들이여..



평화로운 뉴질랜드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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