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엔지니어도 실무선을 벗어나면 하루의 전반이 회의들로 채워진다. 오전 8시-10시는 주로 부서 내부 회의, 10시-12시는 각 임원들 주관 회의, 13시-16시는 유관부서 실무진 회의, 16시-17시는 또다시 부서 내부 복기 회의가 주를 이룬다. 이런 회의들이 몰리는 날이면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을 시간이 거의 없다.
주관자와 목적, 참석 인원 등에 따라 그 종류가 결정되는 회의는, 도움이 되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특히 회의감이 몰려오게 하는 회의들이 그것인데 그 유형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상사가 임원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한다. 바쁜 일정으로 각 부서의 업무를 모두 파악하기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최대한 쉽게 핵심만 모아서 집중 과외식 회의를 한다. 이 경우 실무진은 회의에서 배제된다. 임원의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아랫사람에게 과외받는 모습을 한참 어린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건 어려운 일일 테니까.
만약 과외식의 회의를 요구하는 상사가 부서장이나 파트장과 같은 중간 관리자일 경우, 이건 비극이다. 우선 그 상사가 그런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비극이다. 본인의 업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최근에 이슈 된 일들을 보다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고 있는 실무진에게 의견을 구하는 식의 회의라면 문제없다. 다만 못된 것만 보고 배운다고 임원들이 주로 하는 과외식 회의를 본인에게도 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자신의 무능에 대한 인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건 이런 사람들이 직장에는 제법 많다. 인간은 편한 쪽으로 발을 뻗게 마련이니.
과연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빈번히 일어난다. 주로 상사의 행간을 파악하지 못한 중간관리자가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임원 미팅에서 나온 내용이 본인 부서에만 한정된 내용이 아니라 여러 유관부서들의 의견을 구해야 하는 것일 경우, 임원이 확인하라니까 일단 부서별로 연락을 해서 한 군데 모이게는 했는데 정확히 어떤 결론을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태도다.
이런 사람들의 주된 특징은 다른 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임원에 대한 험담과 심지어 동조까지 구한다는 것이다. "아니, 아무리 임원이라고 이런 식으로 단어만 툭 던져놓으면 어쩌라는 거야~ 그렇지 않아요, 박 책임님??" 그리고는 얼렁뚱땅 찝찝한 회의가 끝나고 서둘러 나가는 사람들의 뒤통수에 한마디를 더 붙인다. "일단 1차는 이렇게 보고하고, 다시 2차 회의 소집할 수도 있어요~ 조만간 또 봅시다" 정말 한 사람의 무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을 좀먹으며 피해를 줄 수 있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회의 중 하나다.
3) 회의봇들만 참석한 회의 (a.k.a. 시간 때우기)
이건 주로 정기로 있는 실무진 회의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업무 중요도는 높지 않으나 부서에서 최소 한 명은 꼭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보통 그렇다. 매주 하는 정기 회의라 agenda도 늘 같다. 회의를 가보면 각 부서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사람들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남는 사람. 해야 할 이야기가 다 끝났는데도 보내주지 않는다. 누군가 회의실을 나가면 회의가 끝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최근 이혼한 연예인 이야기, 올해 성과급 정보 등에 대해 노닥거리면서 최대한 어떻게라도 회의실 예약시간을 꽉 채울 요량으로 시간을 끌어보려 한다. 어느 날 회의를 담당하던 동료가 연차여서 대타로 참석하고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연예인 이야기, 사내 복지에 관련된 정보.. 등 그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주제들과 그 음침한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동료는 그 회의 좀 특이하죠? 멋쩍게 웃으며 내 눈치를 본다. 할많하않. 그런 회의는 자신들의 무능함을 잊고 끈끈한 유대감을 확인하기 위해 회식도 잦다.
4) 긴급한 사안도 아닌데 즉시 모이라는 무례한 회의
보통 회의는 먼저 메일로 일주일 혹은 최소 3-4일 전에 장소와 시간, 어젠다에 대해 공지하고 당일 remind 메일을 보내는 게 상식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 긴박하게 소집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은 분기에 1,2회 정도로 드물다. 그런데도 마치 당장 마구간에 불이라도 난 것 마냥 발연기를 하며 회의를 소집하는 몰상식자들이 있다. (이 경우는 백퍼 전화로 연락이 온다) 그쪽 부서 사정은 나는 모르겠고. 일단 몇 시까지 OO회의실로 와주세요! 라며 본인 말만 하고 끊는다.
어젠다도 모르고 참석한 회의에는 통화 속 긴박함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심드렁한 얼굴을 한 그 부서 사람들이 앉아있다. 그러면 주관자는 "놀라셨죠? 그렇게 긴장하실 내용은 아닌데, 지금 아니면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모여달라 요청드렸어요~" 하며 주먹을 부르는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대체로 진중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오두방정 떠는 관리자인 경우가 많고, 그 부서원들은 '한두 번 속냐?'라는 표정으로 불려 온 사람들을 오히려 안타깝게 본다. 회의가 끝나고도 사기당한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회의록은 최소한 오전 회의는 그날 업무 시간 안에, 오후 회의는 다음날 오전 중으로 공유하는 게 예의다. 회의록에는 논의된 주제들과 관련 내용, 담당자와 납기까지 적어야 한다. 진도를 체크해야 하는 일이면 진행 율도 같이 보여줘야 한다. 사람의 기억에는 한계와 오류가 있다. 회의록이 중요한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한 회의라도 회의록은 꼭 작성해야 한다. 회의가 끝나고 하루 내에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는 데는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이유가 있다. 녹음을 해둔 게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고 노트를 봤을 때는 간결히 적힌 단어들 사이에 어떤 디테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적힌 회의록은 참석자로 하여금 신뢰감과 더불어 앞으로의 회의를 더 충실하게 준비할 원동력을 준다.
얼마 전 단기 프로젝트 때문에 어느 과장이 간사로 있는 회의에 참석을 했는데, 회의가 끝난 지 3일이 지나도 회의록이 날아오지 않았다. 혹 수신처가 누락된 건가 싶어 간사에게 문의를 했더니 아직 보내지 않은 거라 하여 기다렸다.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나 받게 된 회의록에는 논의된 내용과 일부 다르게 적힌 내용이 있었고, 메신저로 간사에게 연락해 그 부분을 수정해달라 요청했다. 죄송하다며 기존 보낸 메일을 발신 취소하고 내가 수정 요청한 부분을 반영해서 다시 보냈는데, 이번엔 다른 부서의 부장님이 전체 수신처를 그대로 하여 FWD 해서는 본인이 언급한 부분의 내용이 잘못됐다고 공개적으로 수정 요청을 했다. 그렇게 같은 일이 몇 차례 더 발생하자 그 회의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고, 회의에 참석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몇 줄 안 되는 회의록이라도 그것을 대하는 진정성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몇 해 전, 부서 회의실에서 긴 테이블과 양쪽으로 늘어선 바퀴 달린 의자들이 치워지고 초록 초록한 카펫에 카페에 온 것 같은 작은 테이블과 벤치, 원목 의자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H/W보다 S/W의 중요성이 대두된 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높은 분들은 H/W만 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