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없는 전염병으로 여행을 갈 수 없는 지금, 가끔 시간이 날 때면 그동안 여행했던 곳들을 떠올려 보곤 한다. 그러다 깨달은 특이점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곳이 있고, 비교적 최근에 다녀온 여행지인데도 기억이 희미한 곳이 있다는 것. 사람마다 여행지를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내게는 그곳의 웅장한 건물이나 화려한 숙소, 멋진 풍경.. 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사람들로 그 나라의 이미지가 각인되는 경우도 있다.
문득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한 작가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실패한 여행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그래서 실패했는지 조차 모르는 여행이라고. 너무 매끄러웠기 때문에 기억이 안나는 여행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적극 공감한다.
아름다운 자연만큼 아름다운 사람들 (feat. 호주)
대학교 3학년, 휴학을 하고 더 큰 세상을 보겠다며 건너간 곳에서 에어컨도 안 나오는 20년 된 중고차를 샀다. 한국에서는 운전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장롱면허로 차를 구입한 것이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는 말은 진리다. 차를 구했으니 이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기쁨에 취해 Mackay의 한 고운 모래사장에 2륜 구동의 세단을 끌고 들어갔다. 다른 차들도 다니길래 내 차도 당연히 가능할 줄 알았다. (뒤늦게 그 차들이 4WD라는 걸 깨달음) 그런데 몇 m도 채 못 가서 바퀴가 헛돌기 시작했고 차에서 내린 나는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창 서핑을 즐기던 딱 봐도 중,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차를 밀어주었다. 고마워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데 본인들의 임무가 끝나자 쿨하게 다시 서핑보드를 들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마치 슈퍼맨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멜버른에서 30km 떨어진 산골마을을 지날 때였다. 작은 마을인 데다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해 언덕을 넘던 중 바퀴 한쪽이 도로 옆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호주도 우리나라처럼 상시 출동 서비스가 있었지만 비용이 꽤 비쌌고, 무엇보다 그곳을 찾아오려면 최소 3-4시간은 기다려야 할 각이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추위에 발을 동동 거리고 있는데 불이 켜 진 언덕 위 집에서 흰 수염 덥수룩한 멜빵 청바지 차림의 할아버지가 흰색 toyota 트럭을 몰고 나온다. 어디 가시나 보다 했는데 내 차 앞에 주차를 하고는 차를 연결하는 끈으로 내 차와 트럭을 묶었다. 그리고는 10초도 안돼서 바로 내차의 바퀴가 도로 위로 올라왔다. 이 모든 과정에 할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연신 고맙다고 하며 언젠가 여행하다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나눠주려고 가져온 한국 기념품을 찾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신다. 이 나라 사람들 쿨내가 아주 경상도 급이었다.
나를 어디로든 데려다준 기특한 토마토
캔버라의 숙소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전쟁기념관에 내렸을 때다. 뭔가 손목의 허전함에 황급히 기억을 돌려보니, 여행 내 함께한 디카를 버스에 두고 내린 것 이었다. 디카보다 그 속에 저장된 사진들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서둘러 버스 정류장에 적힌 고객센터로 전화를 했다. 짧은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후 다시 전화하겠다는 안내원의 말에 5분을 기다렸을 무렵, 정말 안내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고 너의 카메라는 지금 OO번 버스의 기사님이 데리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 버스는 네가 있는 전쟁기념관에 30분 후에 도착할 것이다.라고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기념관 구경도 못하고 그렇게 구름 한 점 없는 더운 날씨에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정말 30분 후에 안내원이 말해준 그 번호의 버스가 정차하더니 환한 웃음의 기사님이 "이걸 기다렸죠?" 하시며 내 디카를 내주신다.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데, 캔버라에서 만난 한국인 동생은 그제야 "와.. 이게 되네. 전 솔직히 언니가 전화할 때까지 헛수고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와.. 이게 어떻게 그대로 돌아오지??" 하며 신기하단 표정으로 나와 카메라, 그리고 유유히 돌아가는 버스를 쳐다봤다.
그렇게 내 기억에 호주는, 누군가 곤경에 처하면 두말없이 도움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로 남았다.
찬란한 문화유산이 아깝다(feat. 이탈리아)
마음먹고 간 유럽 여행. 그동안의 마일리지를 모아 난생처음 비즈니스석을 타고 기분 좋게 내린 공항. 수하물을 찾고 입국 심사장을 통과하기 전 연착된 비행기 때문에 숙소의 호스트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통화를 하던 중 누군가 내 카메라를 낚아챘다. 시내에서 털리기라도 했으면 나의 실수라 이해라도 하련만.. 공항 경찰들과 cctv가 곳곳에 있는 입국심사장 안에서 그런 일을 당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런 나를 더 허탈하게 한 것은 경찰들이었다. 상황을 인지 한 순간 바로 가까이 있는 공항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이 무조건 모든 도난사건은 입국심사장 밖에 있는 공식 경찰 소관이라고 했다. 분명 도둑놈이 지금 이 공간 내에 같이 있을 텐데.. 몇 번을 설득했지만 로봇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탓에 서둘러 심사장을 빠져나왔다. info desk에서 알려준 대로 공항 2층의 경찰서로 캐리어를 낑낑대며 들고 올라가는데 마침 경찰복을 입은 2명이 내려온다. 일단 그들을 붙잡고 도난사건 때문에 왔다고 말하니 자기들은 퇴근하는 중이니 위에 올라가서 서류접수를 하란다. 시계를 보니 info desk에서 알려준 퇴근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힘들게 올라간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cctv를 지금 당장 확인해달라고 했더니 담당 경찰관이 퇴근을 했다고 내일 오란다.
그로부터 3번이나 경찰서를 찾았지만 이쪽 관할이 아니라느니, 차라리 분실물 센터 신고를 하라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사람을 계속 이곳저곳으로 돌렸다. 그곳에서 카메라를 찾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면 경찰이 아니라 도둑과 한패 같았다. 정말 부아가 치밀었는데 여행의 시작점이었고, 앞으로 남은 여행을 위해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여행 말미에 털리면 추억도 같이 털리는 것인데, 나는 그래도 천만 다행히(?) 사진 한번 찍어보지 못하고 털렸으니 잃은 추억은 없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니 지옥 같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세 번 방문한 이탈리아 경찰서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보통의 여행지로 남았을 테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날, 스페인으로 출국하기 위해 테르미니역 공항버스 탑승 장소로 갔다. 로마에는 공항이 두 개가 있다. 국제선 위주의 피우미치노 공항과 국내선이나 단거리 위주의 참피노 공항. 공항 셔틀버스 외관에는 두 공항이 모두 적혀있었고, 피우미치노로 가야 하는 나는 티켓팅을 하는 사람에게 두세 번 확인을 했다. 그는 격하게 피우미치노가 맞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안심하고 버스에 탑승했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국제공항 같지 않은 외관에 사람들도 적었다. 그제야 정류장 이름을 보니 참피노 공항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사기를 칠 수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옆을 보니 같은 버스를 탄 독일 아주머니 2명과 멕시코에서 온 여대생도 같이 어이가 없어하고 있었다. 다들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4명이 같이 택시를 타기로 하고 그나마 이탈리아어를 잘하는 멕시코 여대생이 택시기사와 택시비를 흥정하기 시작했다. 두 공항은 30km 떨어져 있어 택시를 타고 20분을 더 가야 했다. 가는 도중에도 독일 아주머니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은 멕시코 여대생은 이탈리아어를 하는 자신에게도 이렇게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니, 딱 봐도 외국인인 우리들은 아주 좋은 타깃이라고 말해준다. 그나마 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혼자 7만 원이 넘는 생돈을 택시비로 또 날릴 상황이었던 것이다.
위기를 함께 겪으면 돈독한 결속력을 가지게 된다. 공항버스 사기를 함께 당한 우리는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라운지로 갔다. 피우미치노 공항에는 여러 개 라운지가 있는데 내가 가진 티켓으로는 le anfore vip lounge를 갈 수 있었다. 라운지에서 음료류는 보통 본인이 꺼내먹거나 직접 타서 먹게끔 되어있는데, 이곳은 오렌지주스라도 bar에서 직접 바텐더에게 주문을 해야 하는 형식이었다.
음료 bar에서 심신안정을 위한 따뜻한 라테를 주문하고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던 중, 기장으로 보이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 007 가방을 들고 들어와서는 나와 똑같이 라테를 주문했다. 나란히 서서 기다리는데, 대머리의 키 작은 바리스타 아저씨가 갑자기 내 라테를 그 기장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엇!" 하면서 쳐다봤더니 그 기장도 그 커피가 내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sorry" 하며 나에게 넘겨준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바리스타가 이탈리아어로 뭐라 뭐라 하면서 그냥 기장에게 들고 가란 손짓을 한다. 그러면서 하는 제스처를 보니 내것은 다시 만들어 주면 된다고 하는 눈치다. 그 정도 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장은 나에게 미안한 눈짓을 하며 어색하게 잔을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와... 진짜 한국어로 욕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리스타는 그러면서 뒤 이어 들어오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나에게 보이지 않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내 기억에 이탈리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보다, 바티칸의 유명한 그림들보다, 포지타노의 예쁜 풍경보다 부패한 경찰과 낮은 시민의식, 인종 차별이 판치는 나라로 남았다. 조상 잘 만난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자라 정당한 노동 없이 요행만 바라는 망나니 재벌 3세 같이..
이탈리아의 찬란한 문화유산
엄마가 도시락 들고 뛰어오는 줄.. (feat. 포르투갈)
포르투 외곽의 작은 문어 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왔을 때다. 만족한 식사에 기분 좋게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앞치마와 주방 모자를 그대로 쓴 그 문어 밥집 사장님이 한 손에 카메라 렌즈 뚜껑을 들고 헥헥대며 서 있었다. 그 뚜껑은 동행한 친구가 DSLR 카메라로 음식 사진을 찍고는 밥 먹느라 깜박하고 두고 나온 것이었다. 그걸 돌려주려고 손님들이 붐비는 그 시간에 종업원도 없는 식당의 사장님이 우리를 따라 100m를 넘게 달려오신 것이었다. 그 순수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치 어린 시절 도시락을 깜박 두고 등교할 때 도시락을 들고 뛰어온 엄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