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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 새 Aug 12. 2021

나는 무섭다고 말할 수 있는 겁쟁이다

제주단상_4

  내일이면 제주 여행 마지막 날이다.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이 오전이라 실제로 놀러 다닐 수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10-12시에 나의 글쓰기 줌 수업이 있다. 오후 5-6시 에는 아이들의 공감대화 줌 수업도 있다. 두 수업 다 원래부터 예정되어 있는 수업이라 여행 전에 이미 남편에게 금요일 일정을 여행 전에 이야기했었다. 남편도 알았다고 했고, 이 시간을 고려해서 여행 일정을 짜기로 했었다.      


  당당하게 이야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업 때문에 네 식구가 다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함이 있었다. 여행 일정이 얼마 안 남으니 나도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의 미안함과 아쉬움을 품고,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 수업을 참여하리라 생각하며 새벽부터 일어나 글을 쓰고 있었다. 제주 여행을 하며 쓰고 싶은 것이 참 많아서 신나게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남편이 일찍 일어났다. 새벽 6시 경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긴급한 목소리고 불렀다.     


  “여보, 여보, 이리 와 봐요.”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남편에게 갔다.


  “여보, 오늘 우도 가는 거 어때요? 우도 가서 전기차타고 제트 보트타고 오는 길에 저녁으로 흑돼지 먹으면 이번 여행의 피날레가 화려할 것 같은데.”     


  남편은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데 듣는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오늘 수업 일정을 알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여행만 신이 나서 준비하는 남편의 태도가 섭섭했다. 본인 흥에 취해서 나와 아이들은 안중에 없는 건가... 싶었다.      


  남편은 아이들이 오후 수업을 꼭 들어야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아이들 수업을 빠졌으면 하는 남편의 바람이 느껴졌다. 나는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자리를 떴다. 사실은 나도 헷갈렸다. 아이들 수업이 첫 시간이라 안 빠졌으면 했지만, 여행 마지막 날이라 다 같이 재밌게 놀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럼 아이들 수업 대신 오전 내 수업을 빠지고 우도를 다녀올까... 혼란스러움에 내 기분이 급속히 다운되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몰라 결정을 하지 못하니 오전 글쓰기 수업을 위한 준비도 못했고, 어떤 수업을 포기하든 우도여행이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우도를 말하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편의 표정에 맘이 약해졌고, 나도 가서 같이 놀고 싶다는 마음을 인정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나의 오전 글쓰기 수업을 빼고 우도를 같이 가자고.(우도 전기차라 2인만 탈 수 있어서 남편 혼자서 아이 둘 데리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남편은 김이 빠져 우도를 안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나에게 애매하게 말했다. 검색을 좀 더 해보고 잠 좀 깨면 가자고. 나는 남편 말을 믿고 기다렸다. 오전 글쓰기 수업을 못해서 마음이 무거웠지만 애써 괜찮은 척 하면서.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남편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복잡했던 나의 마음을 남편에게 다 던져버리며 말했다.


   “언제 나가는 거야?”     

  남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긴 어딜 가? 당신 그런 얼굴을 하고서? 지금 이 기분으로는 우도 못가.”   

  

  이게 뭐람. 가자고 했으면 가지 이제 와서 안 간다고 하니 나는 어이가 없었다. 글쓰기 수업도 못하는데 우도도 안 간다니, 화가 났다. 남편은 툴툴거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화가 났고, 원래 아프던 허리가 더 아프다고 했고, 이 기분으로는 제주도에 더 머물 수가 없다며 서울로 먼저 올라가겠다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와 버렸다. 아이들과 같이 셋이서 놀러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침울한 분위기의 숙소에서 남편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준비키며 혼자 생각했다.     


  ‘우도 말고도 제주도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아침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렇게 삐져서 아프다고 하고 서울로 먼저 올라가겠다는 거야? 밉상이다, 밉상!! ’      


  예전의 나 같았으면 그 생각까지 하고 아이들과 그냥 나갔을 것이다. 남편은 정말 서울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우리는 몇 주, 아니면 몇 달을 이야기를 안 하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아프다고 누워서 온 집안에 우울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다녔을 것이다. 집안엔 냉기가 돌고 아이들은 살얼음판을 걸어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상황이 또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남편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나 지금 당신과 말하는 게 무서워요. 솔직히 당신이 갑자기 소리 지르면서 ‘이 기분으로 뭘 하자는 거야?’ 할까 무서워요. 그래도 무서움 무릅쓰고 들어왔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안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난 당신이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도 같이 외출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은 기분이 안 좋아도 나가서 바람 쏘이고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이 풀릴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컨디션 안 좋아서 혼자 숙소에 있으면 스스로 비참하게 느낀다는 거, 당신도 알고 있자나요. 나는 같이 가자고 제안하고 싶었고,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할게요.”     



  용기 내어 말했지만, 또 남편과 나의 말싸움으로 이어졌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방을 나왔다. 아이들만 데리고 나와 차에 시동을 켜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출발 전이죠? 잠깐 기다려요. 내려갈게요. 아이들이 생각나서 혼자 숙소에 있을 수가 없네요.”     

  남편이 아이들 옆에 있고 싶다며 따라왔다. 그런데 오전 오후 내내 거의 한 마디도 없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아이들을 겨우 따라오기만 했다. 저런 표정으로 같이 있을 거면 차라리 따라오지 말지!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예전과 다르게 남편도 애쓰고 모습도 보여서, 저녁도 같이 먹으러 갔다. 그 와중에도 제주도 마지막 저녁 식사로 흑돼지 집을 찾아갔다. 하하하. 식당에 도착하자 배고팠던 아이들은 옛날 도시락과 계란찜만 홀라당 먼저 먹고 앞마당에 나가서 놀았다.  


   

  남편은 소주를 한잔 하더니 말했다.

  “여보, 오늘은 내가 KO패에요.”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아까 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왔잖아요. 그 때 나는 이미 KO 패 당한 거였어요. 당신이 자존심 다 버리고 들어오는 걸 보고, 나는 당신과 아이들과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미안했고, 고마웠어요.”          


  남편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루 종일 뚱한 표정으로 있는 남편을 보면서 남편이 우리를 따라오기로 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줄 알았다. 내가 대화를 시도했지만 실패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의외인데, 참 기분 좋았다. 내 마음이 전달된 것 같아서 너무 반갑고 기뻤다.     


  남편은 내가 대화를 시도한 것이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은 아니었다. 먼저 대화 시도하는 것이, 아마 남편에게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리라.      


  나는 그냥 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나의 어려움이라면, 용기를 내는 것이었다. 남편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또 소리를 내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무서움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남편에게 이런 내 마음도 솔직하게 말했다. 남편에게 얼마만큼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우리의 저녁 식사는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오늘 일을 겪으면서 느낀 게 있다. 남편과 내가 한참 갈등이 심할 때 남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르는 일이 잦았다. 그 때 나는 남편이 화를 조절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그런 모습이 아이들에게 끼칠 나쁜 영향을 생각하며 걱정하고 초조해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남편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황을 피하려고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곰곰이 느껴보았다. 엄마로서의 내가 아닌, 아내로서의 내가 아닌, 그냥 신상희가 김병우라는 사람이 소리지르는 게 왜 싫은지.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 소리지르는 게 너무 무서웠다. 나는 남편이 무서웠다. 엄청 똑똑하고 씩씩하고 독립적인척하지만 실은 남편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무섭다는 것을 알아차리던 순간부터, 무서움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그냥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힘도 많이 길러진 것 같다. 남편이 한 번 더 선을 넘는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 땐 용서하지 않을 결심과 용기가 내 안에 있다. 그래서 남편의 반응을 살피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무서움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남편은 자신의 프레임으로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상관없다. 그리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남편은 내 마음의 힘을 느끼고, 남편과 소통하고 싶은 내 바람을 느끼고 자신의 고집스러움과 못남을 인정했다. 나와 남편의 관계가 정말로 예전과는 다른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이번에 정말로 느꼈다.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지만,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하면 된다는 희망과 대화를 해 볼 용기가 있는 상태.     


  그리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확신을 가지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우도를 제안하는 상황에서, 나 스스로 확신이 있으면 남편에게 미안하더라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하는 것에 자신이 없으면 자꾸 끌려 다니고 고민하다가 나 자신과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그 순간 내가 상대에게 미안하고, 상대는 나에게 섭섭할지라도 겪어야 마음이라면 겪어야겠지. 배려라는 이름으로 과하게 상대를 생각하다가 놓치는 게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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