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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 새 Aug 12. 2021

즐거운 꼴을 못 보는 나의 습이 올라올 때는...

제주 단상3

 

제주도 여행 3일차, 즐거운 여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침에 차귀도에서 배 낚시를 하면서 물고기를 여섯 마리나 잡았고, 맛있는 반건조 오징어도 맘껏 먹어보고, 분위기 좋고 맛도 좋은 까페에서 커피도 한잔(비록 테이크 아웃이었지만)했다. 집에 와서 한숨 돌린 후에는 올레시장 가서 먹거리를 한 가득 사왔다. 내가 좋아하는 재래시장, 그리고 넘치는 먹거리들. 오랫동안 줄서서 산 전복김밥과 흑돼지 김치말이, 달콤한 흑돼지 강정, 말이 필요없는 감귤, 남편이 득템한 회 등, 이보다 더 좋은 순 없었다. 


    

맛있게 저녁을 먹은 후에 다음날 해수욕할 바다를 찾아보았다. 해수욕장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금능·협재는 어제 가봤으니 다른 곳을 가고 싶었다. 어디는 물이 너무 차고, 어디는 물이 더럽고, 어디는 너무 바위가 많아 아이들에게 위험해 보였다. 원래도 검색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어디 가는 것은 남편이 다 준비하는데, 갑자기 나는 내가 뭘 좀 알아본다고 안 하던 걸 하기 시작했고, 그게 좀 (많이) 힘이 들었다.  

     

다 큰 어른이 해수욕장 하나 찾는 걸로 힘들어하며 티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힘들어하는 나를 내 자신은 수고했다고 토닥여줬어야 했다. 한숨 돌리고 쉬기도 하고, 괜찮은 곳을 찾은 기쁨도 누리고, 엄마로서 애쓴 나의 모습도 칭찬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나를 힘든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즐거운 여행의 과정 중에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내버려 둔 나.     


그리고 급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인데, 나 혼자 아이들 자는 시간을 재며 아이들에게 서둘러 샤워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힘든 마음과 급한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씻기기 시작하니 그냥 막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둘째는 내가 1층에서 씻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고, 첫째는 2층에서 혼자 씻으라고 했다. 그런데 멀리 있어서 잘 들리지도 않는 첫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편한 목소리로 뭔가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급한 마음에 남편에게 짜증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며 말했다. 첫째 씻는 것 좀 도와주라고.      



그랬더니 남편이 이야기했다. 온수가 안 나오니 보일러를 틀라고. 나는 얼른 보일러를 틀었다. 급속 온수 설정을 하자 금세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사이 첫째가 2층에서 내려와서 보일러 버튼을 만지기 시작했다. 온수 설정을 해놓았으니 만질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본인이 원하는 버튼을 다 눌러본다. 결국 온수 버튼이 꺼져버렸다. 내가 다시 버튼을 눌러 온수를 켜려고 했지만 작동이 잘 안되었고 샤워하고 있던 둘째는 물이 차갑다고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폭발해버렸다. 그런데 첫째가 버튼을 계속 만지는 것만큼 화를 낸 게 아니라 남편이 바람을 핀다면 그 때 낼 만큼의 화를 냈다. “도대체 왜 버튼을 계속 만지는 거야? 엄마가 만지지 말라고 하는 말 못 들었어? 안 만져도 작동이 잘 되는데 도대체 왜 만져서 고장을 내는 거야?” 따발총 같은 잔소리도 부족해서, 하루 종일 별일 없이 잘 놀고 잘 먹은 아이의 머리도 한 방 쿡 쥐어박았다... 엄청 세게...     



그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차! 싶었다. 아들에게도 미안했고, 그걸 다 들어야만 했던 둘째 딸에게도 미안했다. 다들 기분 좋게 잘 놀고 있었는데 왜 나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폭발해서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어버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겨우겨우 잠자리 준비를 시키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들은 그래도 엄마가 좋다며 내 옆에 바짝 붙어 잠자기 전에 책 한 권을 읽어 달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그냥 혼자 책 읽다가 자라며 밀어내고 내 책을 읽으면서 잠들어버렸다. 이럴 땐 현실도피처일 뿐이었던 나의 책...     



다음날 아침 5시 50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산책을 가고 싶다. 아니 가야만 했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필요했다.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 5시 55분에 일어난 첫째가 산책을 같이 가자고 한다.     



전날은 첫째와 함께 새벽 산책을 갔다. 단 둘이 함께 걷는 제주의 새벽이 참 좋았다. 하지만 이 날은 아니었다. 무조건 나 혼자 여야 했다. 엘사가 아토할란에 갈 때 모두를 돌려보내고 혼자 갈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다. 엄마 옆에 있고 싶어하는 첫째의 마음을 거절해야하는 미안함과, 아이들 옆에 늘 있어주고 싶지만 붙어있으면 내가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고를 쳐버리는 나의 한계를 모두 인정하며 아들에게 말했다.    


 

“또또아, 엄마가 지금은 정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아침에 혼자서 조용히 산책해야 오늘 하루 우리 가족이랑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또또이가 계속 따라오려고 하면 우리는 그냥 서울로 돌아가야 할지로 몰라.”  


   

아들에겐 협박으로 들렸을지도 모를 이 말은, 나의 진심이었다. 아빠와 동생이 자고 있는 새벽 6시, 정적뿐인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라고 아들을 겨우 달래고 숙소를 걸어 나왔다.      



숙소를 둘러싼 귤밭을 보며 걷는데, 열 발자국도 지나지 않아 눈물이 났다. 아무 일도 없는 듯 맑은 제주 하늘을 보니 눈물이 더 났다. 어제 저녁 일이 생각나면서, 별것도 아닌 상황에서 짜증을 내는 내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해진다.....     



눈물과 함께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저 좀 도와주세요. 별거 아닌 거에 짜증내고 자꾸만 다 망쳐버리려 하는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제주도에서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고 싶어요..."     



그리고 팔에 걸려있던 묵주를 만져본다. 옛날의 습이 나오려고 할 때, 팔찌나 염주를 튕기면서 정신을 차린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묵주를 한 번 튕겨보았다. 두 번째는 좀 세게 튕겨보았다. 손목에서 팔꿈치 방향 쪽으로 좀 내려서 튕겨보았다. 아... 너무 아팠다. 진짜 너무 따갑고 아팠다..   


  

팔찌만 튕겨도 이렇게 아픈데, 아이에겐 우주인 엄마가 마구 소리 지르며 혼내고 이마까지 한 방 때렸을 때 또또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것을 듣고 있던 다원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들의 아픔이 짙게 느껴졌다.



특별한 종교가 없이 내 안의 신성이든 불성이든 뭐든 찾고 싶어하는 나지만, 옛 습이 나오려고 하면, 이 묵주의 도움을 받고 싶어졌다. 이 묵주를 튕기고 아픈 것을 느끼면 주체할 수 없는 내 마음 속 회오리가 지나가길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제주의 하늘아, 구름아, 바다야, 파도야, 영글어 가는 수많은 귤들아,

나에게 와서 나를 좀 도와줘... 너희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주렴...

팔을 벌려 그들이 주는 기운을 느껴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도했다.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깨뜨려버리려 하는 나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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