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 새 Jan 23. 2022

아티스트웨이 필사_2주

정체성을 되찾는다_자신의 욕구와 욕망, 관심 인식하고 드러내기

(94) 창조적 자아를 되살리는 과정에서는 밀물과 썰물처럼 회복기와 침체기가 반복된다.


(95) 회의가 창조성을 갉아먹는 바이러스임을 깨닫는다면 쉽게 몰아낼 수도 있다. 회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자기혐오를 몰아내는 해결책은 자신을 긍정하는 태도밖에 없다. (....) 다른 사람에게 모닝페이지를 모여주는 것은 자기파괴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96) 우리는 내면의 아티스트를 돌보는 부모이므로 그 아이가 안정된 친구들을 사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창조성이 막혀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적인 아티스트로 여기는 것을 오만이나 아집이라고 생각한다.

(97)친구들의 교묘한 방해를 경계해야 한다. 지금 당신에게는 신의의 탈을 쓴 그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친구들의 의심은 당신의 의심도 배가시킨다. 특히 장신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거나 무관심해졌다는 불편을 조심하라. (...) 당신의 제를 가장 잘 해결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스스로 자신를 격려할 때만 또 다른 응원을 얻을 수 있다.

(98) 당분간 창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불가침의 경계선을 긋고 스스로에게 신념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잘하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회복이 진행되면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보다는 그리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의 치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102) 정신을 빼놓는 사람은 위압적인 어머니로, 변덕스러운 상관으로, 의존적인 친구로, 또는 고집 센 배우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이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데 끊임없이 악영향을 끼친다.



(105) 우리는 이토록 모든 것을 망치는 사람과의 관계를 꽤 끊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 그만큼 정신이 빠져 있고 그만큼 자기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창조성이 막힌 우리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려 든다. 정신을 빼놓는 사람과의 삶이 힘들고불쾌하더라도 창조적인 삶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덜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정신을 빼놓는 사람은 당신이 창조적인 작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마취제이다. 더 이상 정신을 빼놓는 사람과 고통스러운 탱고를 추지 말자. '저 사람 때문에 피곤해죽겠어' 라는 생각이 들면 당신 스스로가 그 사람을 이용해 창조적인 작업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보기 바란다.


(106) 폭넓은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회의주의이다. 이것은 '내밀한 의심' 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종교를 믿든 안 믿은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 의심은 정말 지독하다.

(108) 우리는 창조성 회복을 꾀할 만큼은 용감해졌으나 우주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109)창조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믿음을 꼼꼼히 검토하는 것은 필요하다. 창조성 회복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여는 연습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의 마음을 문이 살짝 열린 방이라고 상상해보라.


(110) 막혀버린 창조성은 종종 환상에 대한 집착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로 돌아가 백일몽에 빠지거나 목적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창조적인 삶이란 끝없는 관심의 연속이다. 관심이라 우주와 나를 연결하고 살아남는 방식이다.



(111) 할머니가 작은 기회들을 음미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인생의 큰 기회들을 날름 삼켜버렸다. 할머니는 거대한 스페인풍 저택에서 트레일러로,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철길 옆 오두막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싸구려 판잡집으로 옮겨 다니며 삶을 할아버지와 함께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견디셨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거듭된 실패에 분노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어떻게 견디셨는지 안다. 할머니는 삶의 물살에 무릎까지 담그고 그 물살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쏟으며 견디셨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른 정신을 갖는 것이고, 바른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관심을 쏟는 것이라는 할머니의 교훈을 내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삶의 진실은 그 삶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깨달으셨다. 삶의 질은 기쁨을 맛보는 능력과 비례하고, 기쁨을 맛보는 능력은 관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말이다.


관심을 쏟으면 헤어진 연인, 아픈 아이, 깨진 꿈 등으로 인한 일상적인 고통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치유된다. 릴케의 말을 빌리면 우리 모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롭다." 관심이란 무엇보다도 서로가 통하려는 작용이다.




(113) 나는 고통 속에서 관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동안,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과거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현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만이 가장 안전했다. 홀로 남겨진 매순간이 언제나 견딜 만했다.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괜찮다. 과거의 결혼은 끝났을지 모른다. 내일 그 고양이는 죽을지 모른다. 연인의 전화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모든 것이 괜찮다. 나는 천천히 숨을 쉬고 있다.' 이런 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매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아티스트웨이 필사_1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