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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 새 Mar 28. 2022

아티스트 웨이 필사_10주

자기보호에 힘쓴다_창조성의 흐름을 막는 요소를 알아차리고 자신을 보호한다

거절이 최후의 자기보호 수단이 되기도 한다

                                                         - 클로디아 블랙




<세부목차>

- 창조성 차단제 : 임식, 술, 약물, 섹스, 일

- 일중독에서 벗어나기

- 창조성의 가뭄 극복하기

- 명성이라는 마약

- 경쟁심과 자기 파괴


276. 창조성은 프리즘을 통해 흐르는 빛처럼 우리를 통해 형상화되어 흐르는 에너지이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을 때 이 에너지는 더욱 자유롭게 흐르고 우리는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에너지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 우리를 데려가려는 곳을 거부할 때면 불안하고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에너지의 흐름을 차단하고 제어감각을 되찾고 싶어진다.



우리는 자신 앞에 열려있는 진정한 잠재력과 폭넓은 가능성을 깨닫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두렵다. 그래서 성장을 늦추기 위해 저마다 차단제를 가지려고 애를 쓴다. 이 모든 차단제의 한결같은 목적은 두려움을 줄이는 것이다. 차단제에 의존하도록 우리는 내모는 원흉은 바로 두려움이다. (9주의 '두려움' 부분 참조)



음식도 그러한 차단제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술이, 어떤 사람에게는 약물이 이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바쁘다 바빠"를 끊임없이 외치면서 자신의 창조성을 마비시키기 위해 일거리를 붙들고 늘어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사랑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 창조성 차단제가 되기도 한다. "그가 그저 나를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그들은 이런 고통스런 생각에 매달려 자신의 창조적인 힘을 느끼지 못한 채 절박한 희생자로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창조적인 사고는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싹둑 잘려나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한 점은 음식이나 일, 섹스 그 자체는 모두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창조성과 관련해서 남용되거나 오용됐을 때만 문제가 된다.




280. 차단장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끊는 데는 배려와 용기가 필요하다.

창조성의 차단은 본질적으로 신념의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직관과 재주, 욕구를 믿기보다는 창조주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몰라 두려워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춤을 추고, 오디션을 받으며 창조주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기보다는 차장치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창조성이 막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창조성이 막히지 않은 사람은 훨씬 많은 위협에 노출되겠지만(불확실성에 노출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음식이나 일, 술, 섹스, 또는 약물 따위가 창조성 차단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창조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유턴 순간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다. 차단제는 이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제야 우리는 불안을 딛고 일어서려 애쓰기 시작할 것이다. 불안은 일종의 연료이다. 불안을 이용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작업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연료이다. 다만 내가 불안을 바라볼 수 있 때에.)




282. 창조성이 막힌 사람들에게 재미라는 것은 그들의 창조성만큼이나 끈질기게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284. 일중독은 창조성을 일개우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일을 남용하면 내면의 아티스트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화려한 무도회를 꿈꾸지만 결국 별 볼 일 없는 자리로 낙착되기 일쑤이다.



소중한 목표를 향해 재미있게 일을 해나가는 것과 일중독은 다르다. 그 차이는 일을 하는 데  들인 시간의 양보다는 정서적인 질에서 찾을 수 있다.


"일중독은 방해물일 뿐이다."




 어둠 속에서 사람을 빛을 찾는다.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무엇보다도 이 빛이 바로 곁에 다가온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286. 어떤 창조적인 생활에도 무미건조한 시기는 있기 마련이다. 이 가뭄의 시기에 모닝 페이지를 쓴다는 것은 인적 없는 사막을 정처없이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닝 페이지 위에서 가뭄을 견뎌낸다. 모닝 페이지는 형태상으로는 문학의 모습이지만, 글 쓰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모닝 페이지는 우리와 같은 창조적인 존재들을 탐험으로, 고향으로 이끄는 일종의 구명 밧줄과도 같은 것이다.



가뭄의 시기에 우리는 신과 싸운다. 우리는 위대한 창조주와 창조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우리는 따질 말이 많고, 따질 거리는 어디에나 있다. 여기는 마음의 사막이다. 그러나 써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모닝 페이지를 쓴다.



써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모닝 페이지를 쓴다.


가뭄이 마침내 끝난다.



창조적인 삶에서 가뭄은 필수적이다. 사막에서의 가뭄은 우리에게 청명함과 관용을 가르쳐준다. 가뭄의 시기가 오면 그 안에 어떤 목적이 있다는 걸 깨닫고 계속해서 모닝 페이지를 써야 한다.



머지않아 - 우리의 기대보다는  언제나 늦겠지만 - 우리가 쓴 모닝 페이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줄 것이고 곧이어 길이 나타날 것이다. 모닝 페이지는 황무지인 동시에 오솔길이다.



289.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다음에도 성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명성은 중독성이 있어서 우리를 항상 굶주리게 만든다. 아티스트로서 언제나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성에 초점을 맞추면 지속적인 결핍을 느끼게 된다.  



명성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었을 때는 자신을 아낌으로서 해독해야 한다. 자신, 즉 자신의 창조적인 자아에게서 받은 팬레터는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사실 명성이란 자신을 인정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하려고 노력하자.



292. 창조성을 가로막는 걸림 밑에는 대개 경쟁심이 깔려 있다. 누군가보다 더 훌륭한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와 선택에서 멀어져 외부의 소리와 영향력에 중점을 두는 게임으로 이끌려간다. 자신의 창조성을 다른 누군가의 잣대로 재게 된다.



이런 식의 비교는 비평가에게나 필요하지 창작활동에 종사하는 아티스트에게는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의 작품으로 태어나기 위해 내부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자.



경쟁심이란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최고로 잘해야 한다는 자아의 요구이다. 우리의 작업이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 -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도 자아의 요구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은 다른 작품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또 모든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예술에 반응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예술의 울림에 응답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소한 어떤 것을 찾아본다고 해도 실제로 새로운 것은 거의 볼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이미 있던 것을 새로운 조명 아래서 보는 것이다.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사람, 홀로 떠있는 대륙 같은 작품을 없다.



293. 창조정신과 상반되는 경쟁심은 이길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니하면 모두 신속히 골라내도록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을 손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발상은 살려둘 가치가 있는가?를 섣불리 결정하기 쉽다. 이것은 의식 속에서 고개를 드는 어린 창조성에게 가하는 모욕이다. 작품활동에도 성숙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이른 판단은 부정확한 판단이 되기 십상이다.




294.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 어색하고 볼품없는 모습을 거쳐 마침내 독립된 개체로 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하지만 자아는 이런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자아는 즉각적인 만족을, 남들에게 인정받는 달콤한 성공을 원한다. 이겨야 한다는, 그것도 지금 당장 이여야 한다는 욕망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인정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변함없이 진실하게 대하는 과정이 바로 독창성이다.  자신의 창조적 관심을 상세하게 계획할 때 독창성이 필요하고, 독창성이 발휘된다. (뒷 부분 조금 편집)





무의식은 진실을 원한다. 무의식은 진실 이상의 다른 무엇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 에이드리엔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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