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
이렇게 7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를 읽고 먹먹했던 마음을 달래며 다음 소설들을 읽다가 마지막으로 읽은 기억의 왈츠에서 또 생각이 많아졌다. 소설 속 인물의 현재와 과거에 이입되어 자연스럽게 내 과거와 현재를 반추하게 되었다. 어설펐던 그 시절이 자꾸만 떠올랐고 후회와 안타까움이 당연한 것처럼 따라왔지만 한편으로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한, 변명과 체념의 당위를 앞세우기도 했다.
각각의 계절에 수록된 소설들 중 몇몇에서 느껴졌던 것이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살아가는 것 같다는... 뭐라고 아직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것이, 뜬구름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불현듯 떠올리고 미래를 예측하며 비관에 사로잡히는 것. 그럼에도 딛고 일어서리라... 는 다짐을되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사슴벌레식 문답 p36)
'사슴벌레식 문답'에서는 대학 새내기 시절 만난 친구 네 명의 인연이, 30년 세월이 지날 때까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간격을, 시간이 많이 지나도 별스럽지 않도록 미래를 예측하면서 조절할 수 있을까?
규정할 수 없는 사람을,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을 그저 산뜻함만 남도록 조절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슴벌레식 문답' 같은 소설은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읽고 마음이 휑했다. 어느 누구를 향한 비난의 감정이 생기다가도 그 캐릭터가 내 속에도 있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 등장인물에 이입되기도 하고, 사실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그 무언가이기도 하니..
동문서답 같은, 인생 다 산 현자의 말 같은, 혼돈스러운 사슴벌레식 문답을 서로 주고받는... 해석하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도 있는.. 그런.
사슴벌레식 문답을 한번 훑듯이 읽고는 다시 한번 정독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다음 소설인 '실버들 천만사'를 읽었다.
모녀의 이야기... 엄마는 딸이 고2가 되었을 때 이혼을 하고 집을 떠났다. 이혼은 '나'를 찾기 위한 몸부림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그 용기의 대가가 너무 크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일상의 하나하나를 카메라로 포착하다 못해 그 속으로 집요하게 들어가고야 마는... 그런 상념들이 끊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좋으냐...
'실버들 천만사'가 무슨 뜻인가 했다. 지금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엉킨 건지 모를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그리고 읽은 소설이 '하늘 높이 아름답게'이다.
먹먹했다.. 지금도 그렇다. 계속 하나님에게(천주교에선 하느님이라고 하지.) 물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마리아를 사랑하시지요?
애초에 없던 목숨인데 이렇게 태어나서 살았으니 됐고 살아서 좋은 때도 있었으니 됐지요, 하고 마리아는 말했다. 제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건 거기까지에요. 사모님. 더는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지 않아요.
세상에,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믿지 않은 마리아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수산나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신으로 저주받은 영혼의 행로에 대해서는. 그래서 오직 장례식 내내 연도만 열심히 했다고 수산나는 말했다. 연옥에 있는 마리아의 영혼이 부디 최악의 곳에 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p95~96)
교회나 성당이나 비슷한 것이 어떤 행위를 해서 복을 받는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는 그런 분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같은 성당 다니는 여자들은 지금도 흔하다. 사람을 가리고 싫어하는 베르타(등장인물 중 한 사람)는 내가 왜 이들과 이렇게 어울리고 있는지를 계속 자문한다.(진저리 나게 싫은데) 그녀는 나중에 자신 또한 하등 그녀들과 다를 바 없는, 고귀하지 않은 지체라는 것을 자각한다.
사람이란 그래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마리아는 언제부터 그렇게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태생부터 투명인간 취급받아서 자신도 모르게 단련이 되었을까?
성석제의 '투명인간'에 등장하는 만수와 거의 동격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아는 같은 성당에 다니는 그녀들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가서 일을 하면서 언제나 호칭을 '사모님'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른다.
소설 속에서 마리아는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 왜냐면 1인칭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대로, 혹은 작가의 시점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래서 더 투명인간의 만수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자존심이라 불리는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마리아는 '무아' 그 자체여서 자존심이든 자존감이든, 그런 것에 매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작은 일 하나에도 자존심이 상해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일이 마리아 덕분에 줄어들 것 같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를 세례명으로 부른다지?
여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읽은 '각각의 계절 소설집' 속엔 여자들만 주로 등장했다.) 베르타, 사비나, 올가, 수산나, 마리아 등등...
마리아는 가풍이 대단히 봉건적이었던 집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딸은 시집가기 전까지 알뜰히 착취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집안의 분위기에서 마리아는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게 공부하고 성당을 다니고 일을 꾸몄다. 그녀가 파독 간호사를 지원해서 떠났다는 사실을 집안 식구들은 사흘이 지나도록 몰랐다.
독일에서의 삶도 쉽지 않았다. 병원에서 힘든 간호 보조일을 하며 정식 간호사가 되기 위한 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는데, 병원 차를 운전하는 터키계 독일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간호학교에 들어갔지만 출산으로 휴학을 하고..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마리아는 청회색 눈동자를 지닌 첫아들을 입양 보내고 오일쇼크의 여파로 강제 송환을 당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후 그녀는 한국에서 생계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하면서 장기 위탁보호라는 이름으로 두 아이를 키우게 되는데... 입양 당시엔 몰랐는데 아들이 크면서 어디엔가 문제가 있었나 보다. 40살이 된 아이는 정신병원에 있고 그녀는 어린 딸과 함께 산다. 하지만 반세기 전 자신이 낳았던 청회색 눈동자의 그 아들을 내내 잊지 못한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믿고 싶지 않은 이유는 많은데, 그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왜 인생들 중에 이렇게 독박 쓰듯 혼자서 큰 무게의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경우가 있나..
초년운 중년운 말년운... 그런 게 총량의 법칙에 따라 주어지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리아가 말한 대로 자신도 좋은 때가 있었겠지만) 소설 속의 가상인지, 진짜인지 모를 마리아의 삶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나는, 과연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큰 폭으로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아픔을 겪는 이는 대다수의 동정을 받을 확률이 높다. 어느 정도 공감 가는 아픔이면 연민은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마리아는 이렇게 지지리 아픈 일만 내내 겪다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야만 했나... (작가님, 너무 하세요..ㅜㅜ)
너무 하세요... 너무 아파요.
내내.... 마리아 님을 생각하면 계속 아플 것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 마리아는 이미 당신께서 사랑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사랑할 거라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