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 마음을 충전하다

상담이 끝나고 나면

by 자화상

대학로에 있는 ‘아름다운 미용실’을 이 년째 다니고 있다. 십 년 단골이던 미용실이 대전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한동안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더랬다. 친구가 추천해 준, 동네 주부들이 주 고객인 제일아파트 상가 미용실도 두어 번 다녀봤고, 시내 중심에 새로 생긴 가격대가 꽤 센 미용실도 가봤지만 다들 2% 정도가 아니라 25%쯤 뭔가가 부족했다. 어차피 마음에 쏙 들 게 아니라면 비용이라도 저렴해야 만족할 것 같았다. 그렇게 대학가 미용실 쪽을 기웃거리다 알 게 된 게 이곳이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1인 미용실이라 혼자 조용하게 머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미용실 선반에 놓인 선인장에 ‘이 구역 가위손, 아름’이라는 팻말이 꽂혀있는 것으로 보아 원장님의 이름이 아름인 것 같았다.


어제는 어느 내담자의 얘기를 듣는데 자꾸 그녀의 정수리에 시선이 갔다. 새로 올라오는 희끗희끗한 머리가 내 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1센티쯤 되었으니 염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나도 염색해야 할 때가 보름쯤 지났는데. 그녀도 상담 중 내 정수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을까?


상담 기록지를 작성하느라 이름을 묻는 내게 그녀는 가명을 말해도 되나요, 하고 대뜸 물었다. 하기는 여기가 은행도 아니고 꼭 실명을 대야 할 이유는 없다. 나이를 물었더니 또 그런다. 나이를 꼭 말해야 하나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리고 상담실에 나타난 여자. 무엇이 불안한지 한시도 손을 가만두지 못하던 여자. 그 여자의 굴곡진 인생사를 두어 시간 듣고 났더니 어김없이 나까지 기운이 축 처졌다.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직도 몸이 천근만근이다.

몸이 천근만근


상담이 끝나면 열에 아홉은 이런 식이다. 타인의 불행에 또렷하게 집중하다 보면 내 몸의 자율신경이 그대로 멈춰 선다. 그래서 상담을 마친 후에는 죽같이 소화하기 쉬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수술 후 마취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김밥을 흡입하는 경우처럼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러나 몸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수리에서 삐져 올라오는 흰머리를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들른 미용실에 아름은 없고 웬 못 보던, 안경 쓴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경녀의 말에 의하면, 아름은 임신을 해서 당분간 가게에 못 나오게 되었으며 그동안 자신이 미용실을 맡아주기로 했다는 거다. 어떻게 정착한 미용실인데 원장이 또 바뀌다니. 그렇다고 도로 나갈 수도 없고 해서 내주는 가운을 입고 자리에 앉았다. 모르는 여자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이 내심 못 미더웠다.


6호로 해주세요.


다행히 나는 아름이 몇 호로 내 머리를 염색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 처음 다닐 즈음 아름이 내 머리를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7호는 너무 밝겠네요. 6호로 해드릴게요.


무색하게도, 안경녀는 아름이 다 일러주었다면서 미리 준비해 둔 6호 염색약을 빠른 손놀림으로 섞었다. 기다리는 동안 어느 유명 치유자의 상담 영상을 이어폰으로 들을 계획이었다. 15분짜리 영상을 스무 번째 돌려 듣고 있는데 아직도 배워야 할 게 산더미라서. 상담가의 별것 아닌 숨소리, 눈빛, 말 한마디가 내담자에게는 벼랑 끝에서 보는 한 줄기 빛이 되기도 하고 가슴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상담은 매 순간이 중요하다. 장운동까지 멈춰 설 정도로 정신을 집중해 보건만 초보 상담가인 나는 여전히 매사에 실수투성이다.


남편처럼 똑같이 바람을 피우고 나면 이 원망이 사라질까요, 선생님?


어제 가명의 여자가 물었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멈칫했던 것일까?


이어폰을 끼려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오른쪽 귀에 염색약이 묻은 게 보였다. 그대로 이어폰을 밀어 넣는다면 묻어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만큼. 미용실 스피커에서는 최신 케이팝이 웅웅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을 들으려면 저 음악 소리를 덮을 만큼 볼륨을 키워야 할 것이다. 이어폰이 더러워지는 것도, 귀가 얼얼할 정도의 큰 소리로 뭘 듣는 것도 싫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계획은 그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이제 와 공부한다고 해서 어제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음료수는 뭘로 갖다 드릴까요?


장갑을 벗으며 안경녀가 물었다. 내장 기관이 아직 제 기능을 찾지 못했으니 따뜻한 물 한잔이면 족할 것 같았다.


어제 고구마 말랭이를 만들었는데 너무 많이 했나 봐요. 좀 드시겠어요?


안경녀는 물과 함께 말린 고구마를 내왔다. 대학로 미용실에서 고구마를 얻어먹게 될 줄이야. 하지만 나로선 다행이었다. 고구마라면 속 걱정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마카롱 같은 건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말랭이나 즐겨 먹는 쌩 아줌마로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관리했다. 그렇게 껍질 채 말린 보라색 고구마를 가능한 품위 있게 씹는데 문득, 내가 이곳에서 뜻밖으로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안경녀가 수건을 물에 적셔와 이마와 귀에 묻은 염색약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따뜻한 물과 고구마로 속을 달랬더니 아까보다 한결 기운이 났다. 건물 모퉁이에 자리한 두 평 남짓한 미용실은 길과 만나는 두 벽이 모두 유리다. 날이 예기치 않게 쌀쌀해진 탓에 행인들은 옷깃을 여미며 총총히 길을 걷고 있었다. 늦가을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실내는 봄날처럼 따듯했지만.


갑자기 날이 추워졌어요.


그러게요. 벌써 겨울인가 봐요. 가을이 너무 짧아요.


내가 창밖에 눈길을 두는 것을 알고 안경녀는 날씨에 대해 말을 걸어왔다. 날씨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든 환영이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그렇다.


샴푸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안경녀는 아름과 달리 드라이기로 내 머리를 아주 오랫동안 섬세하게 말렸다. 마지막에는 뿌리 볼륨 좀 세워드릴게요, 하더니 둥그런 빗으로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 머리를 보기 좋게 부풀려 놓았다. 어차피 벙거지 모자를 눌러 쓸 생각이라 머리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사람 마음이 달걀처럼 매끄러워지는 것이다.


미용실에 온 지 한 시간쯤 됐을까. 안경녀의 정성으로 나는 몸과 마음이 한결 충전되어 있었다. 앞으로 48시간은 재충전 없이 얼마든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의 긴 상담으로 가슴이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듯했는데 잠깐만에 안경녀는 신기할 정도로 온전하게 나를 충전해 놓은 것이다. 그러고서 청구된 염색 비용은 겨우 이만 오천 원. 삼 년 전에 대전으로 떠난 원장님께 내던 것보다 이만 원 이상 싼 값이다.


미용실에서 만난 여자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상담을 이어나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내담자를 만나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한동안 나의 내장 기관은 운동을 멈추고 그것들이 다시 움직이는 데 이틀씩 걸리고. 한숨이 난다. 그때마다 안경녀를 찾기에는 내가 받는 상담료가 너무 보잘것없다.


그나저나 가명의 여자는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충전되었을까? 혹시 부족했다면 다시 만나는 날 이 미용실이라도 가르쳐줘야 하나 싶다. 한 시간에, 그것도 이만 오천 원이면 마음을 풀로 충전해 주는 미용실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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