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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mp Jun 29. 2022

[책]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문학동네

자꾸 이 작가를 존 르 카레와 혼동했다. 이름이 비슷한 구석이 없는데 왜 느낌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책이었다면 좀 더 즐겁게 읽지 않았을까.

안그래도 괴로운 와중이었는데 이 책 덕에 더 그랬다.

작품이 끝나가는 게 두려움이 들게 만든 책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왜 이렇게 끝나지? 뭐 어쩌란 거지? 다 이런건가?

첫 작품부터 그랬다. 중간에 뭐 빼먹고 읽었나 싶었다.

단편 여러 작품의 모음집인데, 하나같이 그랬다. 다만 작가가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두 작품만 좀 나았다.

그리고 그 덕에 조금 안심했다. 왜 그 두 작품을 말했겠나. 자기가 봐도 그게 제일 나았던 걸테니 나머지 작품들 때문에 괴로워했던 건 조금 가라앉을 수 있게 됐다. 내 이해력과 문해력의 탓만 하지 않아도 되나보다 싶은.  

현대적 단편소설이라고 평가하던데 좀처럼 그에 대한 적응이 쉬울 거 같지 않아 그냥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사는게 어떨까 했다. 뭐 그것도 그리 쉽지는 않아.

작품 전체적으로 부부 사이의 문제를 소재로 했다. 부부 사이는 일단 문제가 생기면 봉합이 잘 안된다. 봉합될거면 인간극장에 나오지 소설로 안나온다. 따라서 그 문제는 결별의 핑계일 뿐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결별에 이르는 부동의 이혼사유, 성격차이. 이 책의 부부들의 문제는 성격차이라는 격렬한 이미지-내게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 피터지게 싸울만큼 싸워보는-는 아니다. 그런 격렬함이 애초에 없는건지 이미 사라져버린 건지 알 수 없지만 차라리 좀 격렬했으면 더 나았지 않을까 싶은 지경이다.


깃털들- 아이를 갖고 전형적인 가정이 되어 가면서 겪는 변화에 대해 달갑지 않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친구의 부부가 사는 모습을 혐오스럽게 바라봤지만 결국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버린다. 첫 작품부터 이게 뭔가 싶어 심상치 않으면서 내가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게 만들었다.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쉽지 않은 과정이 너무 급하게 마무리된다.

체프의 집- 체프라는 사람의 집을 얻게 된 남자가 헤어진 아내를 다시 불러 같이 살며 소소한 만족을 느꼈지만 그건 곧 체프의 집을 잃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쉽게 날아가버릴 민들레 홀씨같은 만족일 뿐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애정에 기반한다 해도 생활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주는 안정의 중요함은 매우 크다.

보존- 젊은 나이에 실직한 남편이 집안만 지키고 있다가 프레온가스가 빠져 고장난 냉장고에서 식재료들이 녹아내리자 자신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하고 녹아내리며 참아주던 아내와의 사이도 결국 보존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가졌어야지. 남편이 차라리 집안일이라도 열심히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어 안타깝더라.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보존됐을텐데.

칸막이 객실- 이미 이혼한 남자가 나온다. 오래 안보고 산 아들의 편지 한 통에 아들을 보러 유럽여행에 나섰지만 기차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인해 불안감이 생기고 불안감의 근원은 결국 아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아들의 태도마저 믿지 않은 남자가 일등석 칸막이 객실에서 나와 부대끼는 이등석으로 옮기며 내릴 곳을 지나치고 결국 아들과의 만남을 포기하고 있다. 이건 뭐, 이혼가정의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도 이혼한 부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왠지 일본소설 느낌도 나면서 다른 작품보다는 재미있었다. 거기까지 갔으면 안내켜도 억지로 행동할 만 한데 스스로가 그걸 거부한 것이지만 결국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싶고. 자꾸 이런 결론이 나게 만드는데, 작가든 나든 둘 중 하나는 운명론자나 인연론자에 가깝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든다. 난 그게 맞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작품은 유일하게 좋았다. 스토리도 그렇고 플롯도 납득이 갔다. 빵집에 아이의 생일케잌을 예약해 두었는데 아이는 생일날 아침 뺑소니 트럭에 치게 된다. 사고 당시엔 집으로 직접 걸어오기도 했지만 병원에 간 아이는 결국 혼수상태로 가버리고 곧 죽게된다. 부부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버티다 아이를 떠나보내는데 생일케잌을 팔지 못한 빵집 주인은 자신에 대해 제대로 밝히지도 않고 잔뜩 예민해져있는 부부의 집에 자꾸 협박전화처럼 느껴지는 전화를 건다. 마침 잠깐 들른 부부는 번갈아 전화를 받고 아내는 뺑소니범일 것이라 생각하며 분노한다. 그러다가 아내가 자신이 케잌을 예약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아이를 떠나보낸 밤 그 빵집을 찾아간다. 빵집 주인 입장에서는 이들 부부의 태도가 오히려 행패에 가깝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와 아이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며 애도한다. 그러면서 그 부부를 위해 자신이 갓 구운 빵을 대접하며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럴땐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 부부는 며칠만에 먹을 것을 먹는 것이었다. 따뜻한 빵을 먹어치우며 빵집 주인과 밤새 얘기를 나누는데 그로인해 그 부부가 겪은 슬픔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그렇게 큰 상처의 와중에도 사소하고 작은 무언가가 그 슬픔을 위로하며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공감가는 내용이었다. 아니 계속 이렇게 써주면 안되나? 자신도 이걸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작품으로 꼽았으면서.

비타민- 다시 앞선 작품들로 돌아온 작품이다. 불안정한 상황속에서도 아내는 계속 비타민을 팔게 되겠지.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겁박에 사그라들 욕정을 다른 이성에게 품어가면서 앞으로도 계속 남편은 아내의 옆에서 아내가 뭘하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을까. 비타민 타령은 뭔지 모르겠다. 삶에서 비타민의 소용에 대해 말하고 싶었나. 당시 성행한 다단계의 폐해를 말하고자 했나.    

조심- 알콜중독으로 아내와 떨어져 사는 남자 이야기다. 알콜 중독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반대인 건지 모르겠지만 강박증도 심한 사람이다. 아내는 이미 그에 대한 애정도 걱정도 없어 보이지만 아직은 돈문제가 얽혀 있고 이혼이 된 상태도 아니니 그를 계속 상대해야 한다. 그런 아내의 태도는 남편의 신경증과 알콜의존의 악순환을 가중시키는 것 같고.

내가 전화를 거는 곳- 본격 알콜중독 치료센터가 나온다. 거기서 알게 된 친구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의 사연은 자세하지만 본인 이야기는 별로 없다. 친구는 그래도 아내가 굳건히 옆에 있었고 알콜 중독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보여준다. 자신은 아내도 애인도 있지만 아내는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애인은 애인의 상태도 안정적이지 않아 전화하기에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자신을 알아주고 받아줄 둘 중 하나에게 전화를 걸고자 하고 있다. 아니 뭐 당사자는 상대방에 대해 애정이 깊기는 해? 왜 받아주기만을 바라는 거 같지. 여기까지도 남자들은 하나같이 답답하고 이기적이다. 별 것 아닌 것...이 작품 빼고. 작가도 그렇게 한심하고 흐릿한 남자 캐릭터들을 그리면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캐릭터들에게 확고한 긍정의 시간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차- 존 치버에게 주는 작품이라는데,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을 쓴 그 작가인 모양이다. 둘이 알콜중독 치료도 받고 했던 친구라고 하는 걸 보니. 그 작품도 이런 식인가, 제목때문에 궁금한데 비슷한 류라면 그리 보고 싶지는 않아진다. 그러고 보니 그 제목을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서 썼었고, 그, 홍상수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이 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다. 그래도 홍상수 영화는 좀 많이 한국적이라 그런가 나름 재미는 있다고 봤는데.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미국의 아침드라마가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튼 이 작품은 뭐, 자다 꿈꾸고 쓴 건가, 뭔 의미인지 모르겠다. 친구와의 사연이 있는 모양인지. 거기 나오는 존재들이 인간이 맞긴 한건지 알 수가 없다. 각자 자기들의 말만하고 그러면서 상대방을 관찰하고.

열- 그나마 좀 허무하지 않게 끝내고 있는 것들이 그래도 작품으로서도 괜찮구나 싶다. 여기선 아내가 여러모로 정신이 나간 사람 같고 남편은 그래도 정상적인 책임감과 애정을 가진 인물이다. 아내가 자신의 직장동료와 바람나서 어린 애들도 놔두고 떠나버린 뒤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내는 갑자기 전화를 해와서 도움이 될 사람인 노부인을 보내주고 그 사이 생활에 안정을 느끼던 남편은 한바탕 열병을 심하게 앓게 된다. 이후 노부인에게 자신의 속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내를 제대로 떠나보낼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 노부인마저 떠나며 이젠 정말로 옆에서 붙어있던 인연이 다했음을 알려주는데 아내는 비록 집을 그렇게 나가버렸지만 그들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었던 건지 태도가 심상치 않다. 어찌보면 이혼은 그저 함께할 시간이 다한 것일뿐 별 거 아니게 또 다른 여정으로 들어서는 일일뿐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작가가 별거의 과정에서 애인이 있으면서도 쉽게 이혼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것을 작가일람을 통해 알고보니 나름 자신의 이혼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일어서기가 쉽지 않았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굴레- 이 작품은 대체 또 뭐지 싶다.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가족의 모습과 부부의 관계가 나오는데 아내는 자신의 친아이들이 아닌데도 아이들을 사랑하며 남편에 대해서도 신뢰하진 않지만 진심은 있는 모습이다. 아내의 경제활동이 고되게 보이면서 이들이 꼭 유랑하는 집시들 같아 보이기도 한다. 가족을 이루고 사는 모습과 생활고로 인해 인간이 굴레를 벗지 못한다는 것일까. 아 진짜. 꿈보다 해몽인가.

대성당-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하고 작가가 꼽은 두 작품 중 하나다. 아내의 맹인 친구가 방문하기로 했는데 남편은 맹인에 대해 잘 모른다면서 무미건조하게 사람을 빡치게 하는 질문들을 한다. 아내가 그 친구를 만나는 것조차 심드렁하던 사람인데 그 친구와 만나서는 대성당을 본 적 없다는 맹인 친구의 제안으로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그림을 그려주다가 맹인친구가 느끼는 걸 같이 느끼게 된다. 맹인친구의 시선으로 자신도 대성당을 보았다. 사람에 대한 편견을 부수면서 인식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이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애정의 길로 이어질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근데 그러다 셋이 같이 살게 되는 거 아니냐. 아내와의 관계보다 맹인 친구와의 관계가 더 진심이 되어버린다던가. 뭐 그러거나 말거나 다행이라는 결론이었다. 진정어린 소통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더 느끼게 되기는 했다. 앞선 작품들도 모두 소통과 이해의 부재에서 오는 인간의 외로움과 고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니 근데 그럼 먼저 좀 노력하라고. 상대방 탓을 하지는 않는다지만 상황탓이 크잖아. 데우스엑스마키나 같은 상대방이 등장해야만 건조한 뇌에 기름이라도 칠 수 있는 건가. 그런 상대방의 등장으로 인해서만 긍정의 시선이 열리는 건 무책임하게 느껴지지 않나. 실생활에서 보이는 관계에 대한 고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역시 비혼이 옳은 길이 아닌가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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