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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Aug 02. 2021

연극 이야기 7_우리는 농담이 (아니) 야 를 보고나서

울부짖음과 웃음과 함께하는 애도,

먼저 극의 진행 전반적으로 극장 내에 존재할  있는 소수자를 전면에서 생각하는 운영이 눈에 띄었다. 음성 해설과 수어 통역, 자막 제공까지  누구도 극을 보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 나아가 공연장에 계단이  개가 있는지, 계단의 높이는 어떻게 되는지, 비상구의 위치는  개의 계단을 내려가고  걸음을 걸어야 나오는지에 대한 발화는 극장  모든 존재를 무대 위로 불러오는 것이었다.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는 소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소수자에게도 필요한 부분임을 다시금 느낄  있었다.


배우들의 대사 전달은 ‘발화’ 라기 보단 ‘울부짖음’ 에 가까웠는데, 150분 가량 이어지는 울부짖음에도 어떤 배우도 지치는 기색 없이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이 경이로웠다. 오랜 시간동안 쏟아낸 에너지에 담긴 주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분노일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어떤 대상을 향한 분노일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의 분노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더욱 놀라운 건 누군가의 분노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분명 위로 받았다. 150분의 시간동안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울부짖음에 압도당하다가 편안하게, 또 불완전하게 위로 받았다.


성별 정정을 진행한, 혹은 진행할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에서, “내 삶은 단 한번도 리셋된 적 없다”고 배우는 발화한다. 나는 이 대사에 감히 한 마디 붙이면, 업데이트된 적은 있어도, 리셋된 적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완전히 지워진 백지 위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고, 진행되는 정정은 잘못된 것을 고치는 과정이 아니라, “그럼에도 우리가 화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떨어져 있는 상이한 두 세계, 매순간 공존하는 이 두 세계에 속해 있다는”(랭스로 되돌아가다 15p) 사실과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삶은 이어지고 있다”


화해 불가능한 두 세계가 공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울의 감정은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가능한 것은 우울의 감정을 애도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애도의 조건은 무엇일까. 나아가 연극은 애도가 될 수 있을까. 유언장 쓰기를 다루는 연극의 내용에서 애도의 조건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울의 이유와 기원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과 인정, 그 속에 위치하는 당사자의 발화일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의 말이 정 가운데 위치하는 순간에야 우리는 우울에서 벗어나 애도로 한 발짝을 옮길 수 있으며, 연극 또한 애도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깊이 공감하고, 관습에서 벗어나 분석하고…결국에는 거리를 두기 위한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연출의 말 인용) 연극은 애도로 나아간다.


애도 이후엔 또다시 삶이 이어진다.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가니까. “일주일째 대학 수업에 나가지 않았다” 거나 “일주일째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아서 잘렸다”(이은용 작 가을 손님 인용) 와 같은 말을 친구와 나누며 삶은 이어진다. 나의 몸에 새겨진 흉터와 상처들마저도 나의 몸임을 선연하게 느껴가며 이어진다. 그렇기에 완전한 삶은 아니겠지만,

“나의 삶은 단조롭고 평화롭고 불완전” 하게 이어진다. 분명히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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