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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un흔 May 06. 2020

04. 관계의 적정 거리

내가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바뀌게 된 인간관계

가장 친한 지인들 마저도 들을 때마다 생소한 단어들이 즐비한 나의 최종 유방암 2기 암 타입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BRCA 1 유전자 변이 보유 : 유전적으로 유방암, 난소암과 싸울 수 있는 군대가 부실함 (예방적 절체 권유)

2. KI 97 지수 : 58.97% (공격적인지 구분하는 기준 수치는 20%) / 총 2.3cm 크기 중 1.6cm의 공격적인 암 조직

3. 삼중음성 : 호르몬 영향을 받지도, her2로 인해 암이 증식되지도 않는. 표적치료가 불가능하고 완치의 의미가 없고 재발과 전이가 빈번함.

4. 임파선 전이 : 림프절 1개 전이로 어딘가에 떠돌아다닐지 모르는 암세포를 없애기 위해 항암 중!

5. 오른쪽 팔의 림프 곽청술로 림프부종 방지를 위해 재활 중!


 마치 로또처럼 반갑지 않은 타입들만 쏙쏙 뽑아 걸렸지만, 상피내암으로 발견되어 비교적 굉장히 빠르게 발견한 편이라 다행이다. 주제는 인간관계인데 암 타입을 먼저 나열하다니 의아하겠지만... 가장 객관적으로 써놓고 싶었다.


  '암'이라는 단어 하나로 갑자기 심각하게 나를 대하거나, 유방암은 흔해서 암도 아니래 등의 말로 별거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들이 빈번했기 때문에..






 뜻밖의 계기로 가까워지는 마음의 거리


 같은 유방암 환우라도 기혼자라거나 아이 엄마라면 주변에 많이 알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나도 갑자기 마주한 두려움에 가급적 알리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 알리기 전에 가장 먼저 소식 알게 된 지인은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로 사회에서 알게 된 언니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는 굉장히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언니가 받을 충격보다 마음 무겁지 않게 터놓을 누군가의 대상이 필요해서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두서없이 '저 암 일수도 있대요.'라고 말부터 꺼내버렸었다.

 결과적으로 언니는 마음이 가장 힘든 순간에 제일 큰 위로가 되어준 사람이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언니는 알고 있었을까.. "병은 알리면 알릴수록 낫는대"라는 말 한마디가 그때의 나에게 왠지 모르지만 굉장히 힘 있는 말로 다가왔다는 걸.




위로하는 방법을 몰라서


 미혼에다 평소에도 사람 좋아하는 왈가닥 같은 성격이라, 알려야 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건너 듣는 것보다 직접 말해주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적어도 친한 사람들에게만큼은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카더라의 주인공이 되어 서운하게 하기 싫었다.

 30대 초반의 지인이 암에 걸렸다고 하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려운 문제다. 상대의 위로를 기대한 것도, 마음 아파해주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꽤 씩씩한 편이니 충격받지 않았으면 했다.

 9할 이상 첫 반응은 "오 무슨 소식이야!! 결혼해?!! " 였다. 그래... 내 나이에 흔한 소식은 결혼 소식, 연애 소식일 텐데 어쩔 수 없이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한다고 하며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아픈 건 미안한 일이 아니니까, 빨리 낫겠다는 말만 전했다.


 가장 힘이 되는 위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그대로 있어주는 것. 일상과 다름없이 "그렇구나. 얼굴 보자. 보고 싶다"라는 덤덤한 반응이었다. 나도 이번 기회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방법을 지인들을 통해 배웠다.

 상대가 날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몇 반응에는 상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자연스레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계기가 되어 장점도 있었다.


 씩씩한 거 보니 심한 건 아니구나? 유방암 되게 흔해, 암도 아니래. 수술만 하면 간단한 거 아니야?

 어떻게 해 너 아직 젊은데.. 결혼해야 될 텐데! (안 들음) 나 요새 뭐 때문에 힘든데.. 블라블라 고민상담....

 우리 서아 불쌍해......ㅎㅎㅎ......






 할 수 있는 것 딱 하나. 잘 버티고 잘 나아서 완치하는 것.


 인복 많은 나는 상처보다는 위로를 많이 얻었고, 이제 막 시작이지만 그 힘으로 항암 2차도 잘 해냈다. AC 4차, 파클리탁셀+카보플라틴 12차, 총 16회 차 중 2회 차밖에 안 왔지만, 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야만 한다.


 울렁거려 먹고 싶지 않을 때는 연애하느라 바쁠 주말에 시간 내어, 꽃을 사들고 서울 한 구석에 있는 요양병원에 찾아와 준 지인이 고마워 누룽지라도 먹는다. 응원한다는 믿는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한다. 대저토마토, 떡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며 현실도 생각하라며 십시일반 모은 현금을 내미는 손들이 고마워 냄새에 예민한 코를 막고 밥을 넘겼다. 같은 나이에 필요할 때 쓰라는 현금을 전달한 어려운 결정이 먹먹해서라도 운동은 체력이 될 때는 꼭 하려고 한다. 수납장 깊숙이 넣어 놓은 현금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쓰지 못할 돈이다.


세심하게 신경써준 고마운 마음들

 


내가 사랑하는 나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지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내 몸을 아끼고 건강한 생각 하며 치료를 잘 버텨내어, 아만자가 되기 전 보다 더 건강하게 완치하는 것.


 코로나와 유방암으로 사회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적정 거리보다 나와 지인들과의 마음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나'는 여전히 '나'에요.


 변한 게 있다면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이다. 주변이 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불편한 관계는 멀리하게 된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불편한 관계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랄까. 내가 환자라고 해서 상대가 변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이다. 넘치던 체력이 떨어져 이제는 헬스장을 가기엔 무리지만 걷기 운동은 할 수 있다. 아직도 암환자라는 게 가끔 믿기진 않지만, 어느덧 수술까지 하고 항암 2차까지 끝냈잖아!라고 말하는 긍정적인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으면 한다.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서로의 적정 거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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